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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용병 – (3) 쿠크리Kukri. 파잌 멘Pike men

(11) 용병 – (3) 쿠크리Kukri. 파잌 멘Pike men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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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제작된 ‘왕이 되려던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란 영화가 있다. 영화 후반부 두 주인공은 정체가 발각돼 부족민들에게 쫓기면서 구르카 부대출신 부하 빌리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충성심이 가득한 빌리는 두 사람이 도망갈 시간을 벌고자 ‘구르카 병사에게 후퇴는 없다’고 함성을 지르며 쿠크리를 높이 쳐들고 부족민들 속으로 뛰어들어 결국 최후를 맞이한다.

쿠크리Kukri는 낫과 도끼를 합친 것 같은 형태의 안쪽으로 휘어진 다양한 크기의 단검으로 네팔인들의 상징이다. 구르카족 남자아이들은 열살 전후 성인식을 치르며 용기와 명예의 상징으로 쿠크리를 선물 받는다. 산악에서 나뭇가지를 치거나 자신을 보호할 때 유용하기에 남자들은 자신의 쿠크리와 평생을 함께 한다. 구르카 부대원들은 전투 중 총알이 다 떨어지면 육박전을 벌이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 마지막으로 쿠크리를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뛰어든다.

정식명칭 구르카여단Brigade of Gurkhas의 네팔 사나이들은 유일하게 영연방소속이 아니지만 영국여왕에 충성하며 영국정부의 명령에 복종한다. 1815년 인도를 쉽게 식민지로 삼은 영국은 히말라야산맥의 네팔로 쳐들어 갔다. 그러나, 쿠크리만 들고 대항하는 호전적인 구르카족 남자들에게 완전히 참패 당한다. 네팔과의 전쟁에서 패했으나 구르카족의 용맹함을 알아본 영국은 그들과 동맹을 맺고 구르카족을 동인도회사에 근무케 한다. 그 후 구르카대원들은 크고 작은 전투 등을 거치며 영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고 동인도회사의 후신인 대영제국인도부대BIA 소속으로 자리잡는다.

1차 세계대전 때 영국육군소속으로 참전해 유럽과 동남아시아에서 용맹함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버마전선에선 구르카족 중사가 혼자 일본군진지로 뛰어들어 일본군 24명의 목을 따와 후에 빅토리아훈장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중 구르카부대가 왔다는 소문만 듣고 독일군이 퇴각한 적도 있단다. 한국전쟁에서는 중공군 1개 사단을 구르카 1개 대대병력이 괴멸시켰다. 1960년대엔 영국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 정글 속에서 중국계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영국에 승리를 안겨다 준다. 그 후 중국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치안을 목적으로 홍콩으로 파병되며 영국의 정책에 따라 여단사령부는 홍콩, 각 산하대대는 영국과 부르나이에 주둔한다. 포클랜드/말비나스전쟁에선 구르카군 참전소식에 아르헨티나군이 미리 항복하기도 했다.

네팔국민으로 17~22세 사이의 키 160kg 이상, 몸무게 50kg 이상인 신체 건강한 남자는 누구든지 여러 곳의 입영상담소를 통해 구르카부대원으로 지원할 수 있다. 지원자들은 영어, 수학 등 필기시험과 돌 30kg을 메고 산길 4.2km 달리기 등 체력시험을 포함한 3주간 측정을 거쳐 당락을 가른다. 불합격자들은 눈물을 애써 감추며 다음을 기약하고, 합격자들은 기쁨에 설레며 영국 런던근교 훈련소로 떠나 영어, 군사, 문화와 예절, 체력측정 등을 받는다. 9개월간의 강도 높은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정식으로 구르카여단 내 각 예하 부대로 배치된다. 수학점수가 높은 훈련병들은 육체적으로 편한 여단 내 통신부대나 공병부대로 가는 혜택도 있다.

해마다, 수 천 명의 지원자들 속에서 약 270여명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린다. 워낙 지원율이 높다 보니 재수, 삼수생도 넘친다. 그래서 카트만두엔 구르카부대 출신들이 운영하는 사설입대전문학원 등이 여럿 있다. 거기서 돈을 들여 영어를 배우고 체력을 길러 치열한 구르카 입대시험에 합격해 영국군의 일원으로 세계각지를 돌며 근무하는 게 구르카족 남자들의 일생의 제일 큰 소원이다. 일자리가 부족하고 실업률이 높은 네팔에서 평생 안정된 직장으로 목돈을 쥘 수 있고 또 퇴직 후 연금 등으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구르카족 남자들은 명예를 존중하고 충성심이 강하다고 알려져 제대 후 브루나이 왕실경호부대인 구르카예비부대Gurkha Reserve Unit와 싱가포르경찰 구르카파견대Singaporean Gurkha Contingent 등에서 근무할 수 있다. 싱가폴, 말레이시아 등 특급호텔 등에서도 특채된다. 2007년부터 영국헌법에 따라 영국정규군과 마찬가지로 네팔여성들도 전투부대가 아닌 공병, 병참업무, 통신 및 군악대에 한해서 근무할 수 있다. 2009년부터는 4년 이상 구르카군복무자들은 영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법도 발효되었다.

그러나, 마땅한 큰 기술이 없는 구르카예비역들이 물가가 비싼 영국 땅에서 살아가기는 그리 녹녹하지 않다. 또한, 미망인들과 15년 이하 근무자는 연금혜택도 없다. 그들은 퇴직자들이 운영하는 영국구르카복지회BGWS의 자선기금에 겨우 기댈 수 있을 뿐이다. 15년 이상 장기근무자들만 그나마 연금을 받으나 그 액수는 영국인 제대자들에 비하면 1/3수준이다. 퇴직 후 월급을 모아 고향 땅에 마련한 주택에서 훈장과 복무 중 찍은 사진 등을 벽에 자랑스럽게 걸어 놓고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근무 중 생사를 넘나든 기억을 애써 잊으려 하지만 그 아들들은 부친의 길을 따라가길 원한다.

‘구르카병사는 용병이 아닌 정식군복을 착용한 정규군인이다’. 1949년 제네바협정의 한 규정이다. 국제연합UN설립에 주요한 축인 영국정부는 구르카부대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포클랜드 등 정치적 분쟁 지역엔 배치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편으론, 통제된 환경자체와 명분 없는 전쟁을 싫어하는 현 시대 영국젊은이들을 대신해 영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주는 이 특별한 부대원들에 대한 다각적인 처우개선에 영국정부는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6,900km 떨어진 곳에 스위스가 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Hamlet’을 보면, “스위스 인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들에게 문을 지키도록 하라Where are my Switzers? Let them guard the door”라고 클라우디스 왕King Claudis이 외치는 대목이 나온다.

진남색 베레모에 노랑, 파랑, 빨강, 오렌지색이 세로로 디자인된 르네상스 풍의 제복에 긴 칼을 허리에 차고 긴 창을 들고 서 있는 늠름한 남자의 사진을 한 번쯤 본 적 있을 것이다. 바티칸을 지키는 유명한 스위스근위병이다. 그들은 15세기 말부터 돈을 벌기 위해 먹을 것이 부족한 스위스 땅을 떠나 유럽 각국 궁전 등에서 경호원, 행사병과 궁전경비병 등으로 활동해 왔다. 스위스용병이 명성을 떨친 것은 스위스장창부대 때였다. 피리와 북소리에 따라 긴 창을 들고 돌진하며 용맹이 가득 찬 함성을 지르면 적들은 두려움을 떨었다. 잔인함, 높은 훈련명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스외인부대, 스페인외인부대, 네팔용병 등과 함께 19세기까지 용병의 대명사였다.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17세기 프랑스 군주가 스위스 귀족에게 ‘프랑스가 용병 비용으로 스위스에 준 금으로 도로를 깔면 파리에서 스위스 바젤Bazel까지 갈 수 있다’고 하자, 스위스 귀족은 ‘프랑스를 위해 스위스가 흘린 피는 파리에서 버젤의 모든 강을 넘쳐 흐를 수 있다’고 답했다. 당시, 스위스의 극소수 귀족들만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군주들에게 용병을 공급했다. 용병들을 모집하고 공급하는 독점권을 가졌기에 엄청난 부를 축척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전직관리나 상인들을 고용해 용병모집에 열을 올렸다. 귀족들에게 고용된 모집인들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남자들에게 접근해 돈도 주고 외국의 환상과 용병의 화려함을 부각시키며 술로 현혹해 술김에 계약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당시 스위스는 험한 산악에 자리잡은 버려진 척박한 지대였다. 경작지도 적고 겨우 소젖이나 짜 치즈나 만들며 근근이 생활할 정도였다. 산에서 생활하니 남자들은 강했지만 막상 힘쓸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농사지을 땅이 없었던 대부분의 남자들은 돈을 벌기 위한 방편으로 이웃나라들에서의 용병생활을 선택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막상 스위스에서는 일손이 부족한 결과를 야기했다. 당시 외국세력들은 알프스지역의 남자들을 돈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극히 일부지만 아내와 어머니들도 남편과 자식을 몰래 용병으로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비난을 면치 못했다. 솔직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대신 싸워주는 용병을 모집하기 어려웠다.

용병들의 500년은 스위스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스위스용병들은 외국군주를 위해 유럽의 전쟁터에서 산화했다. 그들은 돈과 재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지금의 스위스를 만들었다. 한편으론, 용병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신체장애 또는 알코올중독이 되어 가족들과 불화가 생겼다. 그래서, 일부 후손들은 용병의 역사를 별로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13~19세기 동안 약 150만 여명의 스위스남자들이 외국정부를 위해 싸웠다. 그들 중 20% 넘게 탈영자란 낙인이 찍혔고, 40% 가까이는 영원히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간간히 용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들렸으나 용병일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바티칸 교황청에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1세Francis 교황이 있다. 그 곳을 지키는 스위스근위병 자격요건은 스위스 군을 만기제대한 독신 천주교도 남자로 19~30세 사이의 키 174cm 이상 고등학교졸업이상의 학력소지자로 정해져 있다. 복무기간은 2~25년까지 선택적이며 아직까지 여성들에게 기회는 없다. 스위스남자들이 외국정부의 용병으로 싸우는 일은 스페인내전을 포함해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848년 스위스헌법에 의해 용병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나, 개인적으로 용병하기 위해 외국으로 가는 거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현재, 공식적인 스위스용병부대는 바티칸 근위병뿐이다. 1506년부터 현재까지, 바티칸시티 교황청의 경비는 스위스근위대가 맡고 있으며, 2006년 창설 500주년 기념행사로 근위대출신자들이 스위스에서 로마 바티칸시티까지 한 달간 행진도 벌였다. 파잌 멘Pike men은 긴 창을 든 남자들이란 뜻으로 스위스용병의 별명이다.

*파잌Pike은 발음에 따라 표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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