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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 4

(53)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 4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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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재자’ 이승만이 하와이로 명명하자 대통령중심제 제1공화국은 무너졌다. 그리고 약 2개월간의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단기 4293년 (1960년) 6월 15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내각책임제를 택한 제2공화국이 들어섰다. 헌정사상 가장 짧았지만, 최초의 공인인 민주 정부는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임시국무회의에서 내각 총사퇴를 의결할 때까지 존속한 장면 국무총리, 윤보선 대통령 정부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 한국민이 그동안 갈망했던 민주주의란 꽃 봉오리는 피지도 못하고 약 11개월 만에 시들었다.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뽑힌 장면은 일제 강점기 때 미국에서 공부했다. 미국 한인 흥사단원이었고 이승만과도 친했다. 그 덕에 해방 뒤 미 군정과 한국인 대표의 통역을 맡았다. 제1대 주미대사로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6•25전쟁 시 유엔군 파병 등 지원을 받아냈다. 내각을 책임진 장면은 정치나 외교의 문외한이었지만 이 업무를 무난히 완수했다. 점잖고 온화한 성품으로 교육자, 종교가, 출판인 등 다양한 경험이 있으나 정치적인 결단력은 부족했다. 그 결과 후세에 5•16 군사쿠데타 당시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은 일제 강점기 시기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영국으로 유학했다. 귀국 후 조선총독부의 협박에도 해방 때까지 일본식 성명 강요와 협력을 거부했다. 민주당 구파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쿠데타 때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의 쿠데타 진압요청을 유혈사태 우려를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으나 군부의 요구로 사퇴를 번복한다. 장면 내각 이후 군정하에서 1년 넘게 대통령직에 있다가 1962년 3월 결국 타의 반으로 하야했다. 영국 신사로 불렸으나 양반집 출신을 자랑으로 여겼고 아집이 있고 독선적이었다.

국회의원이 투표로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선출하고 총리에게 행정의 모든 권한이 부여되는 게 내각책임제다. 민주당이 주도한 국회는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통해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정부가 들어섰다. 이승만 이후 새롭게 구성된 국회는 신•구파로 갈린 민주당이 장악했다. 초대 국무총리로 신파 장면이 선출됐다. 그러자 구파 윤보선 대통령은 정권이 시작되는 와중의 국가원수임에도 장면의 공무원 인사권과 국군통수권 등에 개입하며 부정부패한 정실인사라고 비난하는 등 간섭하고 방해했다. 윤보선과 장면은 같은 배를 탄 정치 지도자로 화합이 부족했다.

서로 잘 협력했으면 역사에 길이 남는 민주 정부가 됐을 것이다. 4•19혁명 이후 혼란한 정세 속에 정치인들은 당쟁에만 힘썼다. 일례로, 검찰은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를 수사했으나, 집권당인 민주당 신•구파간의 이해관계로 관련자를 5•16 군사쿠데타까지 제대로 수사, 구속도 하지 못하였다. 또한, 매일 벌어지는 각종 시위를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자 사회혼란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물론 정부가 단 몇 개월 동안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환경에 대응하는 데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장기적인 경제개발 계획 등을 민간주도로 구상했고 금융, 정책, 통계 등을 맡을 경제기획원을 준비했다. 댐, 발전소, 도로건설 등 대규모 기반시설을 추진하는 국토건설단도 만들었다.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 기반 조성과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자유 선거 등 합리적 통일방향을 제안하며 국제사회가 지지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국가를 모색했다. 일본 천황에게 생일 축전을 보내는 등 이승만 때 왜곡된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이익집단과 사회단체들이 자율적으로 대화와 협력하는 보편적인 방향과 원칙으로서 실천하는 선진 민주국가의 이상적 정책들이었다. 이러한 경제정책 등은 후에 박정희 정권의 산업경제구축에 큰 밑그림이 됐다.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은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하자고 북한에 공식 제안한다. 정부는 ‘순진한 학생들을 공산당의 흉계에 넘어가게 놔둘 수 없다’는 핑계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10일 서울운동장에서 ‘통일촉진궐기대회’가 열리고 경희대생 이수병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에 4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국민은 당장 평화통일의 분위기에 싸였다. 그러나 3일 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시민과 학생 2천여 명을 체포했고 통일 분위기는 깨졌다. 민주당 구파는 민의를 무시하고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만들었다. 이 악법들은 후에 국가보안법 내 집시법이라고 이름을 바꿔 박정희와 그 이후 독재자들이 국민의 목을 죄는 데 이용되었다.

제2공화국의 치적과 정책이 한국의 근대 국가 수립과정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객관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그러나 군부독재가 30여 년 넘게 지속하면서 5•16 군사쿠데타 세력과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제2공화국은 내부의 파벌싸움만 했던 무능한 정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왜곡하고 조작됐다. 신동아 기사에 따르면, 이처럼 제2공화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뒤에는 두 개의 신화가 보인다. 하나는, 산업화가 모자라고 시민사회가 성숙하지 않은 후진국에서는 경제 발전단계를 뛰어넘는 민주주의 성장은 불가능하며 개발독재에 의한 민주주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화와 다원적 시민사회를 이룬 동력이 민중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신념이다.

5•16 군사쿠데타와 관련된 미국 측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한반도를 민주화보다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미국의 세계 전략 정책은 장면 정부가 추진한 병력 10만 감축 및 남북화해 정책 등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제2공화국 시대에 시도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정착과 대외적 자주의 꿈은 내부적으로는 보수세력인 군부와 민주당 구파의 야합과 외부적으로는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군부 쿠데타 지지로 붕괴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통성 있는 장면 정부 대신 정통성 없는 쿠데타를 지지한 미국 측 요인이 제2공화국 붕괴의 주원인으로 보았다. 장면이 쿠데타를 진압 못 한 또는 안 한 것은 미국 정부가 장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당시 윤보선 대통령과 장도영 참모총장도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국민은 장면이 이끈 제2공화국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을 잠시 맛보았다. 그래서 그 후 깊고 어두운 군사독재의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나라에 민주화 운동의 희망을 실낱처럼 이어왔다. 국민의 지지와 참여하에 진취적인 출범을 형성했던 동안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민주주의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장면 정권은 4•19혁명 이후 갑작스러운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혼란이 빚어지는 상황에서도 공권력의 물리적인 질서유지보다 시민에게 자율적 각성의 시간을 주려고 했다.

1960년은 대한민국에서 신생아가 가장 많이 태어난 해였다. 109만 명으로 지금의 두 배 이상이다. 휴전된 지 몇 년 안되었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재건해 갔다. 당시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보트 놀이 등 유람시설이 있어 서울의 대표적 가족 나들이 장소로 또 봄 밤 벚꽃놀이엔 돗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했다. 겨울엔 덕수궁 연못에서 스케이트도 탔다. 명동엔 양식당, 음악다방과 양복점이 유행이었고 거리엔 세련된 양장과 한복 여성들이 어우러졌다. 외국 관광객이나 주한 미군이 많이 사가는 기념품 중 하나는 안에 KOREA라고 인쇄된 축소 모형 아리랑 꽃신이었다. 시민들은 지나가던 경찰차를 세워 얻어 타기도 했다.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없애고, 4•19혁명으로 시민과 학생들이 직접 거리로 나와 이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 정권의 실험장이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등 이승만 때 금기시되었던 남북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관념적 성향이 짙은 문학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였다. 최초로 교직원 조합, 노동조합 등이 설립되며 학생 운동도 활성화되었다. 장면 정권은 지난 정권의 잘못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등 사회질서와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장면 정권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치를 했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민주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적절히 수렴하고 통제하지 못했다. 더욱이 민주당 분열을 수습하지 못하고 신•구파로 서로 편을 갈라 대립만 하다가 박정희에 의해 막을 내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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