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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독일에서 한상균을 위해 촛불을 드는가?

나는 왜 독일에서 한상균을 위해 촛불을 드는가?

독일에서 클레어 함

우리를 위해 싸워온 한상균

나는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독일 교포다. 상당기간 한국 관련 뉴스를 읽지도 않고 살다가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충격 이후, 한국의 인권 신장을 위해 현지에서 집회나 영화 상영회를 열기도 하고, 한상균 석방 촉구를 위한 온라인 청원을 비롯, 다양한 주제의 청원운동도 진행해온 인권 활동가다. (http://bit.ly/2gE9PoP: 한국어, 영어, 불어, 독어 버전)

나는 현재 독일 앰네스티와 ‘희망찬 한국을 위한 유럽네트워크'(ENPK: European Network for Progressive Korea) 및 ‘뮌헨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위안부, 세월호, 물대포, 노동인권 등이 내가 관심 있는 주요 이슈다. 최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집회를 진행했고, 12월 10일 인권의 날에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와 연대하여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작년 민중총궐기를 주도하고 노동개악 반대 투쟁을 이끌어왔던 한상균. 현재 1년간 수감되어 있는 그의 2심 재판에선 박근혜 탄핵정국의 분위기로 내심 무죄판결이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상주 부장판사는 그에게 3년 징역, 벌금 50만 원을 선고했고, 내겐 무척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한국 법조계의 일부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현실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지라, 역시나 하며 그냥 잠자리에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3년 실형을 내린 판사나 8년형을 구형한 검사보다 나를 더 분노케 한 것은 뜻밖에 냉정한 일부 한국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나는 며칠 전 그의 재판 결과를 기다리던 중, “한상균 석방이 촛불민심? 집회 주최측 주장에 찬반논란”이라는 한국일보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고 무척 불쾌했다. 게다가 그 기사 밑에 달린 댓글, “한상균은 일단 별개다. 한상균까지 넣는 것은 촛불민심에서 일반시민을 떨어져 나가게 한다.”을 읽으니 더 화가 났다.

왜 “한상균이 별개”인가? 그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싸워왔나? 한국에는 남녀노소를 포함한 2천만의 직장인들이 있고, 그가 싸워왔던 노동개악은 그 어느 이슈보다도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사무직이건 공장에서 일하건, 많은 직종이 다 포함된다. 해고를 더 쉽게 하고, 노조의 힘을 더 약화시킨다는데, 노조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이 거기에 맞서서 항의하는 것은 그의 당연한 의무일 뿐이다.

실제로,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시민들이 한상균의 구속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질 수는 있다. 그래도, 건강한 상식이 있는 성인이라면, 최소한, 수십만이 참가했던 민중총궐기가 왜 개최되어야만 했는지, 참가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왜 노동개악에 반대하는지는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혐의로 검사가 한 위원장에게 8년을 구형(求刑)한 것이 정상인지도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특히, 언론은 ‘폭력집회’ 가부 논란에만 피상적으로 머무르지 말고, 국민의 대다수 이익을 대변하여 한상균의 재판 추이와 노동개악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설사, 작년 14만 명이 참가했다고 추정된 11월 민중총궐기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폭력 행위를 했다 치더라도, 집회의 공식 신고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 건 비논리적이다. 나도 여기 독일에서 시국집회 신고를 했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지인들을 제외한 백 명이 넘는 참가자들은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생판 모르는 타인들이다. 도대체 내가 왜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나? 물론 독일 법원 판례에 따르면, 나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현지에서는 마음 편히 집회 신고를 한다. 감옥 가는 것을 무릅써야 한다면 나는 결코 집회 신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상균 같은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집회를 그렇게 혐오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의 법조인들과 보수 언론이여. 그대들이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다면, 왜 기업의 폭력에는 침묵하는가 묻고 싶다. 한국의 일부 기업들은 아직도 용역깡패를 고용해서 파업하는 직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심지어, 유성기업의 경우, 고용된 깡패들이 파업 중인 직원들을 향해 차로 돌진해서 상해(傷害)를 입혔다고 자백까지 했는데도, 경찰과 노동부는 이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 적당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 국내 언론도 이에 대해 신기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평소에 폭력집회 비난을 일삼지만, 피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맞는 근로자들의 심각한 폭력 피해에는 침묵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구석기 야만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성생지옥 청원 https://goo.gl/aCZsme 관련 동영상.

나는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재벌회사에서 일하는 지인들도 있고, 공장등에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지인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루 12-13시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매일매일 괴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가장들은 자녀 교육비, 부모 부양비, 전세값 등으로 빚더미에 앉아 “벼랑 끝에 서 있다”고 힘든 삶의 고통을 토해내기도 했다. 내게 소중한 이들로부터 이런 호소를 들으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이런 이슈들은 운명이라고 체념할 게 아니라, 시스템을 개선하면 충분히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야간 대학 강좌를 들었던 나는 긴 노동시간과 고용주들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질려서, 오래전 한국을 떠나왔다. 일에 치여서 매일매일이 괴로웠다. 해외에 나와 살면서 갑자기 노동 시간이 줄고, 직장의 상사들로부터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니 어느새 큰 스트레스가 없어져서인지 사진 속의 나는 항상 밝게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살았을 때는 웃고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던 나였는데 말이다. 노동시간이 줄어 자유 시간이 늘어나니 저녁에는 친구들 및 애인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기 개발을 위해 여러 외국어학원 및 교양 강좌를 들을 수 있었고, 긴 유급/무급 휴가를 통해 평소 좋아하는 여행을 실컷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대학교 때 알바하기에 바빠서 그 흔한 마르크스 자본론도 읽지 않았고, 집회도 나가지 않았다. 사회주의 체제를 믿지 않는 나는 앞으로도 그다지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나의 삶의 체험을 통해 노동시간 단축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래서, 노동조건 개선은 좌파 우파 이념의 문제를 떠나 우리가 인간으로서 행복해지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持論)이다.

한밤의 분노가 다소 누그러지자 나는 한국 사회가 왜 노동인권에 무관심한지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1. 노동을 천시(賤視)하는 유교 문화 2. ‘노동자의 천국’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의 부정적인 이미지 3. 한국의 과도한 반공교육 4. 재벌과 기득권 세력의 입맛에 맞춰 노동운동을 폄하하고 왜곡하는 보수 언론. 아마 이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어울려 노동자들의 당연한 자기 생존권 요구가 노동자들 자신에게서조차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긴 것 같다.

노동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당연한 권리 주장을 하는 것에 지나친 거부감을 느끼는 이 문화, 그것을 조장하고 침묵하는 언론인과 법조인들은 그 결과로, 노동개악의 부메랑이 끝내 자신, 자신이 아끼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심지어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이 ‘노동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희괴한 현상이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나는 목격한다. 자본이 없어서 타인에 고용되어 노동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아 생계를 이어나가면 정신 노동이던 육체 노동이던 그는 노동자인 셈이다. 최근 들어서, 나는 이 부정적인 뉘앙스의 ‘노동자’ 단어 말고 새롭게 신조어를 만들어야 하나 하는 어이없는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노동자는 다 부처이고, 고용주는 다 나쁜 놈입니까?”라고 되물었던 대학교 강사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나는 모든 노동자들이 다 선한 흥부라고 편들며 유치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 평균 38명이 자살한다는 자살공화국 헬조선을 야기하는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지옥같이 긴 노동시간과 비인간적인 처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은 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일하기 위해서 사는가? 살기 위해서 일하는가?” 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고속 경제 성장으로 한국은 세계 경제 11위라고 하지만, 우리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절대로 비슷한 수준이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해답이 노동조건 개선에 있다고 믿으며, 한국 시민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자기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한상균 같은 노동인권가를 존경하고 응원한다.

사실, 한상균은 지난달, 국제사무노련에서 ‘공포로부터의 자유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전 세계적으로 이미 인정받은 세계적인 인권 활동가이다. 민주노총 사상 첫 직선제로 많은 동료들의 신임을 받아 위원장으로 선출된 그는, 3년을 이미 감옥에서 보낸 바 있다. 그런데도 그는 형을 마치고 나와서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노동 인권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왔다. 그런 그에게 우리 국민들은 큰 빚이 있다.

지난달, 파리에서 SUD노조가 한상균의 석방을 요구하며 한국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들의 연대가 너무 고마워서 6시간을 달려 원정을 갔다. 우연한 기회에 France24 방송국의 한국 시국토론회 패널로 참가하여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했는데,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냐’며 충격받던 방송국 직원들의 얼굴 표정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유럽에선 시위를 주도 및 진행했다고 감옥 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상균은 지인에게 보낸 옥중편지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묵묵히 산을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힘들게 싸우고 있는 후배들에게 오래도록 언덕이 되어주자 다짐을 했다”고 적었다. 2평도 안 되는 비좁은 그의 감방에는 작은 국화 화분이 놓여 있다고 한다. 물만 주고 정작 좋아할 이슬과 햇볕을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을 지닌 그는 노조의 대표이기 이전에 “가진 게 없는 아비로서 좀 더 따뜻한 세상이라도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은 아빠”이다. ‘국화와 별과 달과 벗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상균’으로 끝을 맺은 그의 편지를 읽으며, TV에서 보여지는 강한 이미지와는 다른 그의 섬세한 감수성이 언뜻 낯설게도 느껴졌지만, 그의 그런 순수함과 인간애가 싸움을 지속시키는 힘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그가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멀리서나마 촛불을 들 것이다.

언젠가 대한민국에 정의가 바로 서고 상식이 통하는 그 날이 오기를, 새벽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희망찬 한국을 위한 유럽네트워크 (ENPK: European Network for Progressive Korea)
https://www.facebook.com/European-Network-for-Progressive-Korea-1509062576069743/?fre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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