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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빛나는 뿔 달린 용’ 류큐瑠球는 독립왕국이었다

(22) ‘빛나는 뿔 달린 용’ 류큐瑠球는 독립왕국이었다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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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umeisensi61-2

琉球國者,南海胜地而钟三韩之秀,以大明为辅车,以日域为齿,在此二中间涌出之蓬莱岛也,

以舟楫为國之津梁,异产至宝.

‘류큐는 남해에 있는 나라로, 삼한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중국과 광대뼈와 턱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고, 일본과도 떨어질 수 없는 입술과 치아 같은 관계이다. 이 한가운데 솟아난 낙원이 류큐다. 배로 항해하며 만국의 가교가 되니 온 나라에 외국의 산물과 보배가 가득하구나.’

607년 중국 역사책 ‘수서隋書’에 ‘빛나는 뿔 달린 용’으로 ‘류큐’가 언급된다. 이 류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오키나와沖繩다. 오키나와 뜻은 ‘대양의 끈’이다. 오키나와와 류큐 등 유인도 49개를 포함한 160여 개 전체 섬들이 모습이 일본 남쪽에서 타이완 북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이다. 류큐는 타이완과 약 500킬로, 일본땅과 중국본토와는 약 640킬로 떨어져 있다. 오키나와 총인구 140만 명 중 약 70여만 명이 수도 나하那覇에 살고 있다. 오키나와는 지구 상에서 손꼽는 장수촌 중 하나로 더 알려졌다. 100세 넘는 인구가 34/100,000명으로 일본 평균의 세 배가 넘는다.

약 32,000년 전 인류의 뼈가 오키나와 요마시타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인류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나토가와에서 출토된 18,000년 전 뼈는 중국 본토인과 연관이 깊다. 조개무덤인 패총이 많고 바닷가연안에 선사유적지 등이 발견되는 걸 봐선 그들의 선조는 바다에서 양식을 구했다. 최초 거주했던 원주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미크로네시아, 중국본토, 일본 등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인지, 타이완과 남태평양 원주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과 문화적 유사점이 많다.

조선 초기 학자 신숙주申叔舟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서 ‘류큐는 좁은 땅에 인구가 많아 배를 타고 바다를 돌며 해상무역을 생업으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동남아시아 및 중국, 동으로는 일본 및 우리나라와 교류하고 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상선들도 나하에 모여든다. 류큐 백성들은 수도 주변에 가게 등을 차려 장사를 한다’고 서술했다. 그런가 하면, 설성경 서울대 교수 저서 ‘홍길동의 비밀’에서는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은 가상이 아니라 실재인물이며 연산군에 의해 비밀리에 풀려나, 바다를 건너 세운 율도국이 바로 지금의 류큐라고 쓰여있다. 허균의 ‘홍길동’이 일본의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류큐 남서부 아에야마八重山 민란의 주인공으로 민중 영웅인 적봉赤峰 홍洪가와라와 같은 인물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구석기 인류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류큐는 8세기부터 이미 농경문화를 시작했다. 15세기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였고, 류큐 쇼하시 왕은 근방 세 왕국을 통일해 수리 성을 수도로 류큐 왕국을 세운다. 중국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정착하고, 그 후손들은 류큐의 관리가 되어 중국의 문물과 기술 등을 이어간다. 1609년 일본의 가고시마와 도쿠가와 바쿠푸가 침략하자 류큐 왕은 조공을 보낸다. 17세기까지도 류큐 왕국은 중국, 일본과 밀접했다. 속국이 아니면 무역을 하지 않았던 중국을 대신해 일본과 교역을 했고, 당시 네덜란드를 제외한 유럽국가와 공식적 무역을 금했던 일본을 대신해 류큐 왕국은 일본과 타국과의 중계무역을 오랫동안 해왔다.

1854년 미 해군 페리Perry제독이 이끄는 흑 함대Black Fleet가 일본 도쿄로 가던 중 잠시 오키나와에 상륙한다. 흑함대가 상륙했을 때, 한 수병이 몰래 민가에 들어가 여자를 성폭행하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마을주민들에 쫓기다 익사한다. 쫓던 주민들은 이 사건으로 미 해군에게 끌려가 처벌받고, 페리 제독은 옷감 몇 미터를 피해여성에게 주며 합의를 종용한다. 이러니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국의 첫인상이 좋았을 리가 없다. 수백 년간 이어졌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미국과 맞닥뜨리게 되자 일본은 서구의 식민지가 된 인도차이나 등 동남아와 중국을 학습 삼아 몇 단계로 전략을 짠다. 유럽 등으로 사절단을 보내 새로운 문물과 기술을 배워온다. 일본은 산업개발과 서구화만이 서구열강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낀다. 빠르고 산업화를 시작하고 왕을 중심으로 모두 통합을 강조한다.

1868년 일본은 막번 체제를 붕괴하고 왕정을 복구하며 강력한 중앙 권력으로 광범위한 변혁인 메이지유신을 시작한다. 1875년 류큐가 ‘마쓰다 10개 항’으로 사실상 일본에 합병된 후, 류큐의 상태왕은 청나라로 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으나 청은 당시 류큐엔 관심도 없었고 도움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해양에 관심 없던 중국은 수 세기 동안 한 번도 류큐를 침략하지 않았으나 일본은 달랐다. 1879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수백 명의 군사로 류큐를 공격해 슈리 성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오키나와 현에 강제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 상태 왕은 폐위되고 왕자들과 도쿄로 끌려갔다. 그 후, 일본은 류큐의 문화, 언어, 종교, 관습 등을 철저히 금지했다. 강력한 멸족정책인 것이다.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에 합병되며 차별받기 시작했다. 일이나 학업을 위해 본토로 가면 일본인들은 오키나와 인들을 적대적으로 취급하고 외국 천민으로 대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르다는 이유다. 일본본토로 이주한 많은 류큐 인들은 한국인이나 북해도의 아이누족 등 일본 내 다른 민족들처럼 빈곤과 차별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처럼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중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끼어 희생당했다. 그들에겐 중노동을 시키고 결국엔 총알받이로 내보내거나 천왕을 위해 자살을 강요하는 일본도, 적이라고 간주해 총질해대는 미국도 악마 같은 존재들이었다.

강효백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중국 국민당 정부주석 장제스蔣介石는 윤봉길尹奉吉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의거를 보고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한국의 24살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다. 윤봉길 의거 전까지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내부분열이 많은 무능력한 집단으로 여겨 거의 돕지 않았었다. 그러나. 폭탄 한 방으로 일본제국 주요인사를 일거에 섬멸한 윤봉길의 쾌거를 보고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카이로 회담 전 장제스는 김구金九 주석과 임시정부의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요청을 수락한다.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은 한국에 미·영·중 3국의 한국 신탁통치안을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대신 한국독립의 약속을 선언에 포함했다. 일본에 합병되기 전까지 한국과 류큐 둘 다 역사가 오랜 엄연한 자주독립국이었다.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는 류큐를 중국에 귀속시켜주겠다고 제안하나 장제스는 답을 안 했다. 장제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류큐를 독립시키거나 또는 중국 영토에 포함하는 것을 거절하고 한국의 독립만 주장했다. 그래서, 2차대전 후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독립하였는데 안타깝게도 류큐는 일본의 영토로 지금까지 남게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82일간 치열한 전투로 약 95,000명의 일본군과 12,500여 명의 미 육군, 해병대가 희생됐다. 오키나와 현 평화공원 내 평화기념비엔 태평양전쟁 당시 인간방패로 살해되거나 일본군의 강요로 자살한 오키나와 주민이 149,19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차 대전 말기 1945년 4월부터 오키나와는 주민들의 염원과는 반대로 점령한 미군이 신탁통치를 시작해 미군기지가 속속 들어서며 자신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오키나와를 미국에 주고 이득을 챙긴 일본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 일본에 반환된 1972년 6월까지 미 육군, 해병대, 공군이 주둔했던 미국의 영토였고 미군은 무기한 주둔하고 있다.

문제는 32개의 미군기지가 오키나와 섬 면적의 약 20% 이상을 차지하고, 주민들에게 끼치는 범죄 등 실제 영향은 그 이상이라는데 있다. 미군을 상대로 경기가 활성화됐지만 대부분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기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미·일 양국 정부는 후텐마 미군기지가 주택가 가까이 있어 주민들의 생활에 큰 불편을 초래하자 오키나와 내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데 1996년 합의했지만, 미군이 떠나라는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해 아직도 합의이행을 못 하고 있다. 아베 정권에 반대하는 오나가 다케시 일본 오키나와 현 지사는 미군기지의 현 내 이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후부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나이 든 주민들은 아직도 원주민어인 호겐方言을 잊지 않고 있다. 해양국가로 오랫동안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영향을 받은 류큐와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 본토인들과 인종도 다르다. 식민지시대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죽어간 걸 생각하면 오키나와 주민들은 아직도 일본인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우치난추沖縄人’ 또는 ‘바닷사람’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한다. 무기를 사용하는 무술 ‘오키나와 코부도沖縄古武道’ 와 ‘가라테空手’를 계승한다. 가라테는 원래 류큐 인들이 중국 무술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나, 현재는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무술로 세계 곳곳에 알려졌다.

오키나와 독립단체들은 일본 정부가 미국과 전후 비밀협정을 맺고 미국이 오키나와에 핵무기와 군대를 무기한 주둔하도록 했다고 폭로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면적의 0.6%에 지나지 않지만 일본 내 미군기지의 70%가 몰려 있고, 2만 5천여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이 지역 경제와 산업발전에 큰 도움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74%의 오키나와 주민들은 해양환경과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미군기지가 떠날 것을 원한다고 한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 9월 스코틀랜드 독립 찬반투표를 영국과 국제사회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결과는 독립반대 55%로 부결됐지만, 오키나와 독립 찬반투표를 한다면 결과가 다르게 나올 것이라 주장한다.

2013년 5월 류큐 자주독립을 지지하는 N27이란 잡지가 창간됐다. 그리고 오키나와 내 정치인, 교수, 시민단체들과 뜻있는 주민들이 모여 류큐 공화국Republic of Ryukyus를 준비하는 류큐 국가독립 연구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를 희생하는 조건으로 미국과 안보조약을 맺어 이득을 얻었으나, 정작 오키나와 주민들은 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으로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일본에 점령된 후에도 자치권을 일본에 넘겨준 적이 없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들의 독립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류큐 왕국은 일본이 강제 합병했지만, 왕국의 역사는 분명히 살아있다. 우리도 공감하며 류큐 독립을 도와야 한다. 당장이야 큰 효과를 얻지 못하겠지만, 장기적으론 류큐 공화국 재건을 위한 활동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류큐 공화국의 준비단계는 약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향후 강력하게 성장해 올바른 국제정치 환경 속에서 중요한 역사의제를 해결하는 주축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가 계속 류큐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 다음 세대인 요즘 젊은 애들이 일본 정부의 감언이설에 속지 말고 류큐의 정체성을 좀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전에 오키나와에 갔을 때 만난 한 마을주민의 말이다.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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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우선 한국어를 잘하지 않기 때문에 번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코멘트시켜주었습니다.
    나는 오키나와 사람입니다. 옛부터 오키나와에있는 원주민 시대부터 대대로 계속 오키나와에 살고 왔습니다. 일본인가되기 전부터 계속 오키나와 사람입니다. 현재는 일본 본토에 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이 착각하고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터넷과 TV, 매스 미디어를 신뢰하지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달라고합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중국인, 한국인을 일본 본토 사람보다 과격하게 싫어합니다. 반대로 일본 본토의 사람은 중국인이나 한국인을 싫어하고있는 사람은 그렇게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보통의 관계라고 생각하고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일본 본토로 이사에서 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한국과 중국 분들이 많지만, 그것도 절반 당 절반 실수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일본인이 싫어하는 것이지 옛 위엄있는 의연한 태도 일본인 다시 좋겠다. 마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본인이 아닌, 옛 일본인의 생각, 사상, 정체성, 옛 일본인의 자랑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오키나와에서 자랐기 때문에 계속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만큼 한국과 중국의 것은 싫어 있지 않습니다.
    오키나와에 가보면 안다고 생각 합니다만, 원래 오키나와 사람이 아니었다 이민 온 일본인 관광객에 대한 서비스는 좋지만, 나 같은 원래의 생수 오키나와 사람은 일본에 대해 잘 생각 있으며, 한국, 중국인에게는 차별적 인 태도로 접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본이 없었다면 류큐 (오키나와)은 엉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했습니다.
    참고로 일본 본토와 다른 것은 오키나와는 미국인도 싫어합니다.

    한국어가 서툴러서 미안 합니다만, 만약 일본에 갈 기회가 있으면 참고로 해 주었으면 전해 두었습니다.
    오키나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바라고 있고 한국이나 중국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하고있는 분은 착각하지 좋겠다고 생각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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