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허위(대한민국장)는 경북 구미 임은동 출신으로 성균관 박사, 평리원 수반판사, 재판장( 대법원장),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비서원승 (대통령 비서실장)등을 역임한 고관대작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서막을 알린 의병전쟁의 포문을 연 항일 의병장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켰던 선생은 일제가 정미 7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세 번째로 의병을 일으켰다.
경기도 포천 연천 적성 일대를 근거지로 창의한 왕산 허위도 의병들을 이끌고 13도 창의군에 합류했다 당시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의병 총수가 1만명을 넘었다. 이인영(대통령장)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연합의병대(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됐다.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이인영을 이어 총대장이 된 허위는 약 1만여 명의 의병, 해산군인들을 모아 서울 탈환 작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동대문 밖 30리 까지 진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퇴각한 13도 창의군은 해산해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고 허위는 경기도 북부로 군대를 이동시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며 2차 서울 탈환 작전을 준비하던 중 허위 체포에 사활을 건 일제에 의해 1908년 6월 11일 밤 포천군 일동면 유동리에서 일제 헌병에게 기습당해 생포되고 말았다. 그해 10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다.
허위의 순국 후 구미 임은동 임은 허씨가문은 폐족의 위기에 처했다. 왕산을 위시하여 토지 3,000 마지기를 의병 창의 군자금으로 후원했던 큰형 방산 허훈 (애국장)과 함께 의병을 이끌었던 중형 성산 허겸(애국장)등 3형제와 사촌 범산 허형, 시산 허필(건국포장) 그리고 왕산의 네명의 아들과 사위 이기영 (애국장)과 그 형제인 이기상(애국장), 이기하 까지 일제의 사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구미뿐 아니라 국내에서 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왕산이 순국하고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왕산의 종조카 일창 허발은 <종숙부 왕산 선생 행발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선생이 계시지 않음에 집과 나라가 함께 망했다. 조국이 일적(日敵)에 합병됨에 우리 가족이 자연 폐족(廢族)에 이르고 또 자유가 없어지니 분한(憤恨)을 머금은 비통(悲痛)을 어찌 차마 말하리오. 동족 중에도 적이 있어 일인 (日人)의 악정 아래 성명을 보존하기는 만가지로 생각해도 방책이 없었다. 종제 허학과 더불어 남몰래 상의하여 기유년 (己酉年 1909년) 아우 학이 먼저 가권을 거느리고 만주로 갔다.
왕산의 유족은 부인 신씨와 4남4녀였다. 장남 허학 (애국장), 차남 허영, 3남 허준, 4남 허국 그리고 장녀는 왕산과 같이 의병활동을 하였던 이기영에게 시집을 갔고 아들 이강준이 있었다. 차녀는 장세철에게 출가하였고 3녀는 청송으로 출가했으나 일찍 사망하였고 어린 막내딸이 있었다.
맏형 방산 허훈이 1907년 서거하고 1908년 아우 왕산이 순국하자 일가의 기둥이 된 성산 허겸은 왕산의 유족뿐 아니라 임은동 허씨집안을 이끌어야만 했다. 왕산의 장남인 허학은 부친 허위의 순국 후 이미 1909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서고 있었으며 1912년 허겸은 제수인 왕산의 부인 신씨와 3남 허준과 이기영에게 시집간 장녀와 그 둘째 아들 이강준과 딸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그리고 1915년 음력 3월에 다시 구미 임은동에 돌아온 허겸은 사촌 범산 허형과 시산 허필등 일가 전체와 영천 어느집에 맡겨둔 차남 허영과 범산 허형에게 맡겨 둔 왕산의 막내 딸을 데리고 김천 부상역을 통해 모두 서간도로 망명을 갔다. 이때 범산의 아들 허발과 허규 그리고 시산 허필도 아들 허보, 허형식등 일가 전체와 집안의 머슴들도 같이 동행했다. 그리고 서간도 통화현 다황거우에서 몇해 전 먼저 망명한 왕산의 유족들과 일가 전체가 다시 만났다.
※ 대한광복회 지휘장인 우재룡이 영천의 산남의진에 있을 때 왕산이 산남의진을 격려하여 군자금 2만냥(현재가치 5억원) 지원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차남 허영을 영천에 맡겨 둔 것은 이 인연일 것 같다.
왕산의 장남 허학(1887~1940)은 통화현 합니하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에 참여하였다. 김동삼 (대통령장)과 함께 동화학교를 설립하였고 동흥학교도 설립하였다. 경신참변을 피해 목단강시와 주하현을 거처 연해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한 허학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쫒겨나고 1940년 카자흐스탄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허학의 딸이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의 도움으로 한국에 정착하여 서울 천왕동에서 살고 있는 허로자다. 80여년만의 귀향인 것이다.
왕산의 후손들과 그 일가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왕산의 사위 이기영과 그의 두형 이기상, 이기하 3형제에 대한 기사는 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왕산의 사위 이기영과 그 형제에 대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살펴보고 관련자료를 살펴보았다.
이기영(李起永) (1874 – 1918)은 충남 보령(保寧) 출신이며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사위로 1913년 임병찬(林炳瓚. 독립장)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왕산의 장남 허학과는 13살 많은 처남 매부 사이로 왕산의 부인 신씨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할 때도 왕산의 맏딸(이기영의 처)와 이기영의 둘째 아들 이강준도 따라갔다고 한다.
허학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국내와 연결하여 활동하다가 1913년 9월 임병찬(독립장) 등이 주도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사건으로 1914년 5월 동지 54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는데 이때 매부 이기영, 중형 이기상과 부하였던 정철하 등이 연루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기소된 이기영은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8년 1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기영의 중형인 이기상(李起商)도 왕산이 의병을 일으킬 때 비서로 활동하였고 이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활동에 참여하였다가 아우인 이기영(李起永, 허위의 사위)과 동지 김창식 등과 함께 1914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5년 6월 3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19년 10월 20일 왕산 허위 순국 111 주년 추모식에서 예를 드리고 있는 분이 바로 왕산 허위의 사위 이기영의 손녀인 이정재 여사.
이기영, 이기상의 맏형인 이기하(李起夏)는 여중룡(애국장) 선생이 쓴 김산의진 병영일기에는 이기찬 (李起璨. 애국장) 김산의병대장과 함께 1896년 선산 임은리에 거주하던 왕산 허위 선생을 찾아 의병을 일으켜 김산의진을 창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산 허위의 사위 이기영 등 3형제가 국권회복투쟁에 뛰어들었고 3형제 모두 옥중에서 순국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기하 선생은 자료가 미비해서 아직 독립유공서훈을 못 받았다. 이정재 여사가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허위 일가의 가계도, 이 가계도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왕산의 4남 허국은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허웅배의 <허진회상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허준)의 불행은 왕산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중략) 위의 두형(허학, 허영)들은 조부가 살아계실 때 필요한 학식을 가질 수 있었고 아버지(허준)와 아우(허국)은 조부님이 순국하신 후에 학문을 닦아야 했다.
막내 아버지 허국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허준) 자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문제도 문제거니와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총무부장 혹은 경리부장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공부할 정도의 편안한 위치에 놓이지도 않았다.
범산 허형의 아들인 허발과 허규는 종숙부 허겸과 재종형 허학등 친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에 매진하였다.
허발은 3.1독립운동이 남북 만주로 확산되자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8월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허발의 장자인 허채와 왕산의 외손자 이강준(李康濬)도 신흥무관학교에 다녔으나 졸업하지는 못했다. (허은- 아직도 내귀에 서간도 바람소리가 중에서)
1920년 경신참변을 피해 허학을 비롯한 범산 허형과 시산 허필 가족은 서간도를 떠나 일제의 탄압이 미치지 않는 북만주로 이주하였다. 허학과 허국은 가족을 데리고 영안현 철령하에 이주하였다가 주하현 (현 상지시) 하동으로 옮겨갔으며 왕산의 장녀인 이기영의 아내는 아들 강준과 함께 주하현으로 이주하였다 왕산의 삼남 허준은 1920년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로 이주하고 얼마 후 성산 허겸도 뒤따라 왔다.
허준이 영안현 산시에서 활동할 때 김좌진 장군과 같은집에서 살았고 김좌진 장군이 허준의 아들 허광배, 허웅배, 허환배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김좌진 장군은 왕산의 직계 제자인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가 군자금 10억원을 주어 만주 부사령으로 파견하였고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왕산의 차남 허영도 김좌진 장군과 같은 집에서 살았고 허경성등 아들들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허영은 독립운동을 하러 다니며 몇년 만에 한번 씩 집에 들러 허경성은 부친을 자주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왕산의 장남 허학과 4남 허국은 목단강시 철령하에서 정착에 실패하고 주하현 하동으로 이사를 했다가 다시 모친 신씨(왕산의 부인)와 1925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두 형제는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허학은 끝내 일본인 밀정에게 체포돼 카자흐스탄에서 옥사했다.
허학과 허국이 1925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후 왕산의 장녀와 그 아들 이강준은 주하현 마가점(현재는 흑룡강성 상지시 흑룡궁진 여명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왕산의 외증손녀 이정재 여사가 태어난 곳이다. 이강준은 주하현 마가점(馬家店)에서 유력한 한인으로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1929년 부터 허형식의 항일 유격대 활동과 동북항일연군을 지원하였으며 1943년 조선독립연맹에 가입하여 지역책임자로 활동했다.
주하현 삼고류는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이 된 허형식 장군이 주하항일유격대를 창설한 곳이다.
허위 일가는 북만주 각처로 흩어져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항상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등 남만주 각처에 흩어져 독립투쟁을 펼치던 인사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1922년 일창 허발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딸 허은을 결혼시켰고 이무렵 왕산의 막내 아들 허국도 이상룡의 손녀 이후석과 혼인하여 안동 임청각 석주가와 구미 왕산가는 겹사돈의 관계가 되었다.
세상이 몰랐던 독립운동가들⑥ – 이육사 https://t.co/4Mt3cyToP8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3대 후손인 이가호 씨와 경북 구미의 독립운동가 집안인 허형의 딸 허길 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종이가게 (@akfrdmsgksmfdp) March 15, 2019
또한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은 범산 허형의 딸이며 일창 허발과 일헌 허규는 이육사의 외삼촌들이며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
왕산 허위의 순국 이후 임은 허씨 일족 전체가 서간도 망명 이후에도 단 한번도 끊이지 않고 국내와 연결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며 자신들도 직접 온몸으로 투신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으며 근 100여년 동안 국제적 미아 신세가 되고 또한 일부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중국, 북한, 그리고 미국 등지로 흩어지며 좌우대립의 이념적 상황에서 희생되기도 했다.
또한 왕산은 건국훈장의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됐을 정도로 그의 공적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데다 학계에선 널리 연구된 독립운동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에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올해는 3.1 혁명 100주년 임시정부 100주년의 뜻깊은 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름도 남김없이 조국광복을 위해 희생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문 전체가 3대에 걸처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은 전세계 독립전쟁의 역사상에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조국 독립을 위해 가문 전체가 그 길을 실천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명문가, 왕산 허위 일가를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왕산허위일가의 항일투쟁, 목숨바처 나라를 사랑한 선비 왕산 허위, 아직도 내귀에는 서간도 바람소리가 등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장 먼저 사형되신 독립투사 왕산 허위 선생. 키르기스스탄에 사시는 후손들을 모셨습니다(첫째 둘째 사진). 고려인동포와 현지교민 대표를 모시고 만찬. pic.twitter.com/mJpBvuRHZx
— 이낙연 (@nylee21) July 18, 2019
문재인 대통령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대한민국 역사의 주류로 세울 것
의병장 왕산 허위 후손 허게오르기 허블라디슬라브, 할아버지 고향 구미에서 살고싶다.https://t.co/2jlwugQk9F
— 사람사는세상!사람이먼저다! (@hankorea84061) April 19, 2019
키르키스스탄에 남겨진 왕산의 4남 허국의 후손들, 그들은 언제 간절히 원하는 할아버지의 고향 구미에 돌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