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허위 의병장 후손인 허게오르기씨와 허블라디슬라브씨는 할아버지의 고향 구미에서 살고싶다고 밝혔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 중인 항일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4남 허국의 아들들인 허게오르기씨와 허블라디슬라브씨 가족을 장기태 위원장 신문식 구미시의원 김성대 민문연 구미지회 사무국장이 서울 허로자씨 자택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좌로부터 장기태 위원장, 허벽, 허로자, 허게오르기 부인, 허게오르기, 허블라디슬라브, 신문식 구미시의원 ⓒ김성대
대한제국 당시 의병대장으로 맹활약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1854∼1908)의 4남 허국의 아들인 허게오르기(75)와 허블라디슬라브(68)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이 애국지사 후손들에게 제공하는 의료서비스를 받기위해 키르키스스탄에서 일시 귀국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를 면담하며 우리 국적을 취득하여 서울에 살고있는 왕산 허위 큰 아들 허학의 둘째딸인 許로자(94)씨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성대
許로자씨 집에 놓여져 있는 독립유공자 명패. 달성군 하빈면 묘동 사육신 박팽년 집안이 허로자의 외갓집이다. ⓒ김성대
경북 선산군 구미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허위 선생은 구한말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놓이자 의병 활동을 벌였다.
왕산 허위 가문은 3대에 걸처 가문전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왕산 허위의 맏형 방산 허훈은 당시 땅 3,000마지기<60만평, 현시가 600억 상당>를 팔아 동생 성산 허겸과 왕산 허위의 의병 창의 군자금으로 보태고 자신도 직접 진보 의병장으로 참전했었다.
허위는 성균관 박사 등을 거쳐서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 [현 대법원장에 해당],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비서원 승(현 국무총리 급)을 지내는등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일제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국권회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분이다.
당시 고관대직에 있던 자들이 일제 만행에 협조하거나 혹은 침묵하고 있을 때 왕산은 벼슬을 버리고 항일투쟁의 최일선에 앞장선다. 의병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하고 경기도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대대적인 항일 유격전을 벌였다.
의병대장으로 일제와 맞서 싸우던 왕산에게 매국노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관찰사(도지사)와 내부대신(행안부장관)을 제시하며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꾸짖었다고 한다.
13도 창의군 군사장(참모총장격)을 맡았으나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귀향하자 왕산은 총대장을 맡아 활약한다.
1908년 4월. 13도의 진영에 통문(通文)을 보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국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그즈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하는 것이 아니다.
차마 왜적과 함께 살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허위 의병장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에 항의하는 의병들을 모아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다 일본군에 붙잡혀 1908년 9월 사형당했다.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가 죽어나가는 서대문형무소의 1호 사형수였다. 허위 의병대장은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던진 것이다.
서울의 을지路..종路.퇴계路.세종路는 누구나 잘 아는 도로명이지만 하루에 수십 번 교통방송안내에 흘러나오는 왕산로의 유래는 잘 아는 사람들이 없다. 바로 이 왕산로는 허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로명이다. 경북 구미에도 왕산로가 있다.
정부는 왕산 허위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일제에 의병투쟁으로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순국 이후 더 이상 구미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성산 허겸이 제수와 허위의 4남 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범산 허형, 시산 허필등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허위 선생의 장남 허학(1887~1940)은 만주에서 교육사업을 벌이다 고종의 밀명을 받아 조직된 의병단체 대한독립의군부 사건 주모자로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허학의 동생 허영ㆍ허준ㆍ허국도 일제에 평생 쫓기는 몸이 됐다. 왕산의 장남 허학은 결국 일제 밀정에 체포돼 카자흐스탄에서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남 허영과 3남 허준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독립운동 성지인 안동 임청각도 왕산 가문과 인연이 깊다. 석주 이상룡의 손녀 이후석과 왕산 허위의 아들 허국이 만주에서 결혼했으며 석주 손자 이병화 독립투사는 왕산 사촌의 손녀 허은과 혼인으로 맺어진 겹사돈 관계다
왕산의 4남 허국은 만주에서 러시아로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키르키스스탄 까지 유랑의 삶을 살았다. 허국의 아들이 허게오르기와 허블라디슬라브다.
허 게오르기는 모스크바 국립대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모스크바 전기회사 최고의 기술자로, 동생 허 블라디슬라브는 우크라니아 오뎃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전기공학과 지질학을 전공하고 지질학교수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이 분리 독립된 후 극심한 소수민족 차별로 인하여 직장을 잃은 두 형제는 10여 년간 화물차 운전, 소작 농사 등 생계를 위해 힘든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했으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로 넘어가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허게오르기의 움막집
고종황제시 국무총리를 하신 왕산허위 선생님이 1908년 5월 3000명 의병을 이끌고 서울탈환작전을 시도하다 일본군의 신무기에 밀려 경기도연천에서 재집궐하여 훈련하던 중,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908년10월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셨고 후손들은 일경을 피해 러시아로 피신하여 살던 중, 윤덕호 감독이 찾아내어 100년만에 귀국을 시킨 내용이다.
13년전 100년만에 다시 할아버지의 고향 한국으로 귀향한 후 청주아파트 공사장에서 시멘트를 나르며 막노동 일을 하는 왕산 허위 의병대장의 친손자 허 게오르기는 결국 다시 키르키즈스탄으로 되돌아갔다.
2006년 1월20일 100년 만에 허위선생 친손자 허게오르기 허블라디슬라브 가족이 조국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희망과 꿈을 가지고 찾아온 조국은 그들에겐 안타깝게도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냉냉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입국한지 한달여가 지나자 그들은 가지고 온 돈도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갈 비행기 값을 벌려고 청주시 모 아파트 공사장에서 시멘트 포대를 메고 5.6.7층을 오르내리는 일용 잡부직으로 일을 하고 어느 의료기 회사에서 100만원 월급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결국 그들이 태어난 키르키스스탄으로 되돌아갔다.
당시에도 구미시에서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이야기했으나 말뿐이었고 아무 조치를 해주지 않아 다시 되돌아갔다고 한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애국지사 왕산 허위 선생의 후손들을 초청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보훈공단제공)
신문식 구미시의원이 허게오르기와 허블라디슬라브 형제가 구미에 올 의향이 있느냐고 묻자 두 형제는한국에서 살고 싶고, 할아버지의 고향 구미에서 살고싶다고 했다. 또한 범산 허형의 둘째 아들인 일창 허발의 손자인 허벽(84)씨도 남은 여생을 동생들과 같이 구미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일창 허발의 딸이 바로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임청각의 3대 종부 허은이다. 일창 허발은 민족시인 이육사(원록)의 항일 정신을 일깨운 외삼촌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에게 사형까지 당하신 허위선생의 직계후손들이 한국에 와서 살아갈 길이 막막하여 급하게 구한 일자리가 공사장 막 노동꾼, 의료기 회사 외판원이었다.
지금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은 3대에 걸처 독립운동한 위대한 독립운동가문을 잊지말고 기억하고 그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경북 구미에 독립운동가 14명을 배출한 명문가가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국적회복도 못하고 있다ㅠㅠ#범산_허형#왕산_허위 https://t.co/9JrPvMGmq9— 별바라기(ㄷ_6ㆍㅅㅈㄷ) (@sichosae) March 19, 2019
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https://t.co/FaIjBuoaXi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에서 참석한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특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문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에도 독립운동가 후손분들을 찾아다니며 감사드렸었죠.— 다시,봄 🌱 (@silence97) 2018년 8월 14일
왕산 허위 의병장의 현손녀(증손자의 딸)로 우즈베키스탄에 살다가 한국 국적을 얻은 키가이 소피아씨(사진 왼쪽)는 “독립운동 명문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늘 잊지 않았다”며 “국적 취득을 계기로 대통령이 초청해 줘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대한민국 역사의 주류로 세울 것이라고 말하며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챙기고 있는 이 시점에 이번에는 왕산의 후손들이 구미에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까? 구미시민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야 할 때가 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