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6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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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정변으로 잉태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이 7개월 후 새롭게 헌법을 개정해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대통령은 4년 중임제이며, 대선 4개월 후 국회의원 선거가 있고, 제2공화국과 달리 대통령 중심제로 국회의 기능을 약화했다.
1962년 사회 통제와 가뭄 등 안 좋은 경제 상황으로 박정희는 1.5% 차(470만 표)로 윤보선을 이겨 1963~’67년간 제5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추진한 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경제정책뿐이었다. 자금은 경제원조와 투자단 유치, 서독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 파병과 미국의 경제적 지원, 한일기본조약을 맺고 받은 돈 등으로 충당했다. 이때 모아진 자금 등이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이 됐다.
어쨌든 박정희는 경제개발 정책과 베트남전 특수로 수출이 급속히 늘어나는 등 눈에 띄는 경제성장에 힘입어 또 윤보선을 이겨 당선된다. 서울, 경기도와 호남에서는 패했지만, 강원, 영남, 부산, 충북, 제주 등에서는 압승해 1967~1971년간 제6대 대통령이 됐다. 4개월 뒤 총선에서는 서울, 부산 등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에 참패했으나, 그 외 지역에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크게 이겼다.
압승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여당과 이에 맞서 개헌선 저지와 박정희의 집권을 막으려는 야당의 필사적인 투쟁으로 선거는 불법과 부정, 부패가 난무했다. 여당이 이기자 야당은 장외투쟁으로 나섰고, 불법을 인정한 여당은 관련자들을 출당시켰다. 이러한 선거 후유증에도 박정희 정부는 1968년부터 2년 5개월 만에 서울-부산 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고, 기간산업과 중화학공업, 수출도 증가했다. 1969년 박정희는 3선 개헌을 단행하며 대통령의 연임 횟수를 기존의 재선에서 3선으로 연장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신선한 돌풍을 일으켜 서울과 경기, 호남에서 큰 차이로 앞섰다. 박정희는 강원, 영남, 충청 등에서 앞서 100만 표차로 간신히 3선에 성공했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89석, 민주공화당이 113석을 얻어 겨우 과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에서 김일성을 만나 유신 선포를 사전에 교감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헌법을 통해 국회를 해산시키며 제3공화국도 막을 내렸다. 유신쿠데타와 동시에 북한도 주체사상과 주석제를 명기한 독재 헌법을 만들었다. 제3공화국은 대한민국이 급성장하며 동시에 독재의 서막이 시작된 시기다. 그 결과 지금까지 박정희를 경제성장으로 치켜세우거나 장기독재로 평가절하한다.
1969년 6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가 테러를 당한다. 밤에 괴한들이 차에 질산 병을 던진 것이다. 김영삼은 무사했지만 차 일부와 아스팔트가 녹아 내렸다. 김영삼은 그 다음 날 국회에서 “이 독재국가를 끌고 가는 원부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 김형욱은 민족반역자다. 이건 날 죽이려는 정부의 음모다.”라고 연설했다. 당시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강하게 비난해서 박정희 정권의 테러로 의심되지만, 범인은 안 잡혔다. 김영삼과 야권의 반대에도 3선 개헌은 결국 통과됐고 이 사건 이후 야당에 대한 테러가 10월 유신 이후 더 노골화됐다.
대한민국의 경제계획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서 4.19 이후 출범하여 경제 제일주의를 국시로 삼은 제2공화국 민주당 장면 내각 정권 때 경제학자, 민간기업인, 미국 경제인들이 공업화를 목표로 참여해 시작됐다. 원래 개발 5개년 계획은 소련 스탈린이 공업발전을 위해 만들었었다. 2차 계획부터는 더 전문적인 기법이 도입되었다. 1977~’81년 제4차 계획부터는 교육, 사회복지 등의 내용을 포함해 ‘경제 사회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명칭도 변경했다
1953년도 한해 수출의 15%(미화 5백7십만 불)가 공산품이었지만, 1960년엔 수출의 34%(미화 1천만 불)로 양과 질에서 크게 성장했다. 1962~’66년간은 1차산업은 부진했지만, 목표치를 넘은 경공업 수출 덕분에 계획보다 높은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수출 신장세는 정권을 안정시키며 1964년 수출 1억 불 달성을 기념해 ‘수출의 날’을 지정하며 본격적인 수출 우선 정책으로 돌아선다.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7~’71년 동안 광부, 간호사 서독 파견, 1965년 한일기본조약 축하금, 베트남 파병과 미국의 지원 등 공공차관, 상업차관을 본격적으로 들여왔다. 대한민국은 5년간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해 1971년 6억 불 등 총 22억 불을 조달했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 2년 뒤 경부고속도로 완공 등 인프라 확충과 시멘트공장, 비료공장 등을 세워 농촌에 보급하며 1970년 새마을운동이 첫걸음을 뗀다.
그러나,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세 가지 친기업 정책을 유지했다. 기업들 위주인 정책은 서민들에겐 고통이었다. ‘저금리’는 실질적인 마이너스 금리로 신규 사업 진출, 차입 경영과 같은 기업 몸집 불리기의 부작용을 낳았다. 쌀 가격이 싸야 저임금으로도 먹고 살수 있다는 ‘저곡가’ 정책은 농민들이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는 도농 격차 심화의 원인이 된다. 저가에 수출해야 한다는 ‘저임금’정책은 1970년 봉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 계기가 된다. 그 후, 신민당 김대중의원은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했고, 노동자는 시위 중 신민당의 당사로 피신하는 일도 있었다.
1967년 7월 중앙정보부에서 동백림(東伯林) 간첩 사건을 발표했다. 정부는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통해 간첩 활동을 했다며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을 납치하고 고문해 독일, 프랑스와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 독일서 활동하던 음악가 윤이상, 이응노 화백과 천상병 시인이 고문당해 폐인이 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3선 개헌으로 부정 선거를 자행했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 운동과 규탄 시위가 이어지자, 시선을 돌리고자 사건을 조작했다. 이 음모를 주도한 서독 대사 최덕신은 후에 월북한다.
1966년 5월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이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해 사카린 약 55t을 건설 자재로 꾸며 밀수해 판매하려다가 들통났다. 뒤늦게 경향신문의 폭로로 드러나자 부산 세관은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만 원을 부과했다. 중앙정보부의 비호 하에 삼성은 밀수한 사카린을 팔아서 일부를 정권의 비자금으로 주고, 정권은 밀수를 눈감아준다는 말이 흘렀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해 유신을 반대한 도예종 등이 반공법으로 기소돼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시킨 날조 사건이다. 또 하나는 사법살인으로 유명한 1974년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국가보안법•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으로 기소해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하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을 이용해 무고한 국민을 살해한 사법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대표적 인권 탄압의 사례 중 하나다
한일기본조약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체결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모든 법적 배상, 보상 책임을 완전히 끝맺게 한 조약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위해서는 민심을 달랠 경제개발 등이 급했다. 이에 따라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만들었으나 이를 실행할 자금이 없었다. 그때 박태준이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금을 불법 유용하여 기간산업을 개발하자는 건의로 협상이 이어진다. 이 협정을 통해서 받은 무상자금과 차관은 한국 경제의 공적 및 사적 자금으로 전용되었다.
김종필을 앞세워 굴욕적 협정에 배상 조약을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 격렬 시위를 벌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4년 6월 3일의 시위. 이른바 6.3 항쟁이다. 박정희 정부를 지지했던 4.19 혁명 세대 대학생들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격렬히 반대했으나, 박정희는 이런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한편, 한일기본조약 배상금은 피해자들에게 9% 정도만 돌아갔다. 그나마 야당의 강한 목소리 덕이었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일제 강점기를 비롯해 1965년 이전 존재했던 모든 청구권 문제를 법적 공식적으로 한 번에 해결했다. 미국 CIA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일본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단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기업이 1965년까지 5년간 민주공화당 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불을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해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1년 4월 27일까지 제5~7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 국민투표, 그리고 1972년 12월 23일부터 1978년 7월 6일까지 제8~9대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 체육관 대의원 투표를 통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9년 11월 박정희는 죽은 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 인물명에 포함되어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2017년 7월 14일 자 조선일보에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 발행이 취소됐다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광고가 실렸다.
“여러분들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야기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박정희 공화당 후보는 1971년 4월 25일 대통령 선거 유세 중 말했고, 그 후 10월 유신을 통해 영구집권을 이어나갔다.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박정희 씨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게 됩니다.” 이틀 뒤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장충단 공원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경고했던 게 곧 현실로 다가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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