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5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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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장면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전국에서 대학생 시위가 51회, 고등학생 시위는 117회가 있었다. 10개월간 연인원 100만여 명의 시위가 2,000여 회 일어났다. 민주당 장면 국무총리 시절 하루 평균 7.3회의 시위에 3,870명 이상이 참여했다는 말이다.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통제가 붕괴하자 목소리가 높은 각 이익단체에 의해 한국사회가 뒤흔들리면서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제도적 권위는 무시되고 직접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과잉 민주주의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당시 한강대교에서 검문하던 육군 헌병대는 전차를 앞세운 쿠데타군을 저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사회정치적 혼란을 묵과할 수 없다며 군이 나선 것이다.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8일 정오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경기도 일대 등에서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김포 공수단, 해병 1 여단, 육군 포병단, 5, 12, 30사단 병력 등 수만 명이 한강을 건너 방송국, 국방부, 국회 등 서울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국회 직원들은 그날 아침에 출근하다 국회 내에서 무장한 군인들을 보고 놀랐다.
삼군참모총장도 모르게 장성, 영관급 장교 등이 사전모의 한 것이다. 장면 정권은 즉시 진압하려고 했지만, 서울 인근 주요 군부대는 이미 반란군이 장악했고 주한 미군 총사령관마저 불개입 의사를 밝혀 반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주한미군과 주한 미 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성명이 있었지만, 반란군은 서울시민 등 국민을 인질로 삼고 윤보선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을 회유함으로써 장면 국무총리를 사퇴시켰다. 유혈 군사반란 60여 시간 만에 제2공화국은 무너졌고 십여 명의 사상자를 낸 군사 정변은 군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삼권을 장악하며 군부독재를 시작한다.
주동자는 당시 박정희 육군 2군 부사령관 소장이었고, 김종필, 김형욱 등 육사 8기생 9명이 핵심 세력이었다. 박정희는 미리 육군장성들과 주요 각 군 지휘관들을 포섭해 비밀리에 조직을 만들었고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극비리에 진행된 모든 상황은 대부분 장면 총리에게 보고되었다. 그래서, 박정희 측은 전라도 국회의원들이 육군 장성들과 거사를 모의한다, 박정희가 육군참모총장과 반란을 준비한다 등 역정보를 장도영 참모총장과 장면 총리에게 흘려 혼란스럽게 했다. 그 결과 쿠데타는 발각되지 않고 성공한다.
쿠데타 원인으로, 당시 국군은 광복군과 중국군, 일본군, 만주군, 함경도파, 서북파 등 여러 세력의 파벌과 인사적체가 있었다. 창군 직후에는 김구와 정치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인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이 중용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주요 요직에서 배제했다. 이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을 앞세웠으나 세력이 커지자 이번엔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군 출신을 제거한다. 이 와중에 일본군 경력과 남로당 전력 등으로 좌천된 박정희와 육사 5기, 육사 8기는 진급이 안 됐다. 또한, 장면 정부가 학생과 군부 등을 통제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쿠데타 세력은 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 사회•경제적 혼란, 군 내부 인사가 쿠데타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1964년 5월 3일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대한민국의 5•16 군사 정변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친미 이승만을 폭력시위로 내쫓은 4•19 혁명을 반미혁명으로 보고 친미혁명으로 정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쿠바혁명을 모방한 여러 반미혁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을 우려했다. 4•19 혁명의 영향이 자리 잡기 전 친미혁명을 일으켜 반미정부를 전복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5•16 군사 정변이 그 답이었다.
쿠데타 성공 후, 박정희는 부의장,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는 정변의 성공과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당시 헌법상의 국정•국군 통솔권을 가진 장면은 새벽에 미국 대사관이 문을 안 열어주자 카멜 수녀원으로 피신해 미 대사관에 진압을 요청한다. 윤보선은 피신하라는 장도영의 연락을 받는다.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주한 미 대리대사는 윤보선에게 ‘진압명령서에 서명하면 바로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했으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싸워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의 공산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반대했다. 매그루더, 이한림 야전사령관 등은 반대했으나, 미 정부의 지지 표명, 내각의 총사퇴, 윤보선의 포기 등으로 쿠데타는 성공했다.
1961년 5월 19일 저녁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윤보선의 발표 후 박정희와 장도영을 만난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라며 장면을 비난하고 박정희를 찬사 했단다. 박정희 등이 형식상 하야를 만류하자, 윤보선은 다음날 오후 사퇴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 결정이 국제적․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랏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 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한다.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민주적 정권은 붕괴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약 3년간 군정 통치가 시작됐다. 군정 기간 중 정변세력은 특수범죄 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을 통해 반대세력 약 2천여 명을 제거하고,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 헌법을 개정했다. 제1공화국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포상이 없었다. 군정 세력은 취약한 정통성을 위해 1962년 3월 1일과 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을 포상했다.
당시 60년대의 국제 정세를 보면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가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정권 수립 움직임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냉전 분위기 자체는 조금 완화되었지만, 속으로는 내부 결속을 위한 세력화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그런 국제 정세와는 다르게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이 쫓겨나면서 서서히 민주화의 토양이 마련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민주당 정권이나 장면 내각이 이러한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파벌싸움에만 열중했다. 이때 5•16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4•19 혁명이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면, 5•16 군사정변은 반대로 권력 유지를 위해 군부대를 동원해 대한민국 사회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의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연 초석이라는 의견도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며 박정희를 비판했다.
쿠데타 초기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지지부진했던 친일파와 기득권 청산에 불만을 가졌고, 장면 정부 역시 비슷했기에 불만이 팽배했다. 언론인 송건호는 초기에는 박정희를 지지했다. 더욱이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민정 이양과 혁명과업 수행을 주장해서, 당대 일부 지식인 중엔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에 천거되기도 했다.
사상계 6월호에서 사회운동가 장준하는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다. 하지만 곧 박정희가 공약을 안 지키자, 민정 이양과 친일세력 청산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쿠데타 적대 세력의 중심이 되어 박정희와 맞서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코리언 리퍼블릭(현 The Korea Herald)’ 지에 ‘5•16 쿠데타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의 첫머리에 ‘5•16 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비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 된 적이 없다’고 논평했다.
북한은 남한에서 쿠데타를 예측하고 주시해 왔다. 북한은 5월 16일 중공에 쿠데타 정세를 설명하며 “혁명을 지지하는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했다. 또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이 주도했고, 미 제국주의자들이 안 했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측했다. 특히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극심한 반동에 의한 쿠데타로 혁명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북한은 중공에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 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 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했다.
신동아 2007년 1월호 김영명 한글문화연대 대표의 5•16에 대한 글에는, 1961년 군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근대화, 서구화한 집단이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주동세력은 군 정화 운동이 실패하고 사회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무력을 통한 정권 탈취를 감행했다. 비록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고는 하나, 민주주의 압살로 귀결됐다는 점에서 분명 혁명이 아닌 쿠데타였다. 5•16은 한국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예고한 정변으로 고려조의 무신 통치가 끝난 뒤 수백 년 동안 지속한 민간 우위의 정치•문화 질서를 파괴했다.
쿠데타 이후 한국은 강력한 군부 통치자의 등장과 기술 관료의 성장으로 자율성과 능력을 함께 갖춘 강성국가로 변화했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빨리 성장했고 민간사회는 엄청난 변모를 경험했다. 군부가 ‘혁명’을 추진해야만 했던 이유로서, 군부의 정치적 초연성, 군의 민주적 훈련, 군의 행정적• 정치적 역량, 투철한 반공정신, 정의와 양심의 편에 선 군인의 청렴성 및 행동주의를 들었다.
군부는 1950년 10만 병력에서 6•25 전쟁을 통해 1958년 60만으로 성장해 한국사회에서 단일 집단으로는 가장 큰 조직이었다. 이러한 군부의 양적 팽창은 민간집단이 미성숙한 현실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역할의 팽창으로 이어졌고, 남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더욱 심화했다. 그러나 양적 팽창보다도 정치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6•25 전쟁 이후 군부가 이룬 급속한 제도, 기술, 조직의 발전이었다. 미국의 군사 원조와 훈련 지도로 성장해 1961년엔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하고 서구화한 집단이 됐다. 군부가 민간조직보다 먼저 근대화하고 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은 당시 많은 신생국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5•16 쿠데타의 경우 국민의 저항도 없었고 현직 민간 정부는 쿠데타를 저지할 능력도 뚜렷한 의지도 없었다. 또한, 처음에는 쿠데타를 반대했던 미국도 군의 권력 장악이 굳어지자 인정하는 태도로 변했다.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던 것은 민간 우위의 정치•문화적 전통하에서 군부 집권이라는 것이 일반 국민에게 생소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5•16은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피를 적게 흘린 쿠데타였다. 그만큼 쿠데타에 대한 명시적인 반대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광복 후 13년 동안 이어진 국가 건설 시도가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5•16 쿠데타는 한 해 전에 일어난 4월 봉기보다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을 한국사회에 끼쳤다. 무엇보다도 쿠데타의 주역들이 압도적인 물리력과 조직력으로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치 기반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신이 인식한 대로 국가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군인들의 행동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스스로 ‘통치자’이기를 의도했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엄청난 물질 성장과 개발을 경험했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압살 됐다.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장기 집권은 이전에 지속해온 한국 정치의 파행이 심화한 결과면서 그 뒤에 나타난 숱한 정치•사회적 모순의 근원이었다. 박정희 통치를 통해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투쟁으로 얼룩졌고,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전과 그에 따른 다양한 문제를 겪게 됐다. 이 사건은 본디 군사혁명, 군사반란, 군사 정변 등 다양하게 불렸다. 5•16 주체세력이 정권을 잡고서부터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는 독재정권에 의해 5•16 군사혁명으로 미화됐고, 민주화 후부터 5•16 군사정변, 쿠데타라고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2012년 09월 17일자 동국대 대학원신문을 보면, 미국은 처음에 5.16을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묵인한다. 이유는 냉전체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독재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내부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이런 국제정황 속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그 동안 한국경제가 성장했고, 그 경제성장을 내세워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5•16은 원칙적으로 봤을 때 혁명이 아니다. 명백한 쿠데타다.
역사학계의 보수 원로 김일영의 저서를 보면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면서 5•16은 명백한 쿠데타이며 훗날 혁명으로 둔갑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쿠데타는 정상적인 국가 정권을 무력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혁명(Revolution)은 해마다 별자리가 순환되어 변화하는 천체에서 가져온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체제를 군주정, 민주정, 군부정 세 가지로 나누고 이 정치체제는 별자리처럼 계속 순환된다고 보았다. 근대의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와 같은 가치를 내거는 헌법의 성립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한마디로 다수 민중의 봉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찬성만이 혁명을 판단하는 유일한 규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조선 시대까지는 국가체제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물론 외부의 침입이나 내란, 봉기 등의 군사적인 시도들도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정리가 되면서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을 중심으로 사실상 군정체제가 이루어졌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체제로 이어지면서 군 세력이 최고 통수권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하며 대다수의 사람이 이러한 군부 체제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5•16 이후의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과 그로 인한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업적이 뒤따른다.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한다던 혁명공약 제6조를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 그리고 6, 7, 8, 9대 대통령이 된다. 박정희는 약 18년간 수많은 사람을 구금, 고문, 살해한 독재자로 결국 측근의 총탄을 맞고 생을 불명예로 끝냈다. 박근혜는 지난 대선에서 ‘아버지가 한 일이 최선이었다’라고 했다가 비판이 이어지자, ‘후대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고 했지만, 어떻게 해도 박정희는 정당성이 없다.
5•16 쿠데타 당시 주한 미 대리대사 그린은 윤보선이 반란군 진압에 반대하자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 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라고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 말은 1993년까지 33년간 군부 통치로 이어진 현실이 되었다.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 후 51년 6개월 만에 그의 딸은 *부정득표율 51.6%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자리를 꿰찼으나 헌정사상 첫 번째로 임기 중간에 탄핵 후 파면당해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혈서와 동봉한 편지
*진실의 길 신상철 대표의 18대 대선 부정에 대한주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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