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 3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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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 사상계(1960년 5월호)
1960년 4월 11일 마산 합포구 신포동 부둣가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실종된 아들을 찾으러 마산 거리를 헤맨 지 한 달이 다돼서였다. 3월 15일 저녁 1차 마산 시위 때 경찰은 최루탄에 맞고 숨진 그의 시신을 마산항 바다에 버렸었다. 경찰이 감춘 참혹한 그의 시신을 본 수천 명의 분노한 시민은 2차 마산 시위로 이어진다. 이는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같은 또래인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오게 된 실마리가 된다.
단기 4293년인 서기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정-부통령 선거 여당인 자유당 후보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이었고, 야당인 민주당 후보는 대통령 조병옥에 부통령 장면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조병옥이 죽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졌다. 문제는 고령인 그의 유고 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부통령직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는 사실 이기붕 부통령 만들기였다. 여당은 선거의 패배를 예측해 사전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반 공개 투표, 유령투표, 대리투표 등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여당은 급하게 만든 득표율 99%를 다시 88.7% 등으로 낮춰 발표했으나 이미 대부분의 국민은 부정선거를 느낀 폭풍전야였다.
최초로 부정 선거가 확인된 마산에서 민주당원, 중년 여성, 학생, 노인 등 2만여 명의 성난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했다. 그러자 경찰은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을 동원해 해산시킨다. 이에 더 자극받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찰과 대치하자 행정은 마비된다. 한밤중에 갑자기 정전이 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한다. 경찰의 총격으로 시민이 죽자 분노한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맞섰다. 이날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로 수백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해 벌인 시위’, 부통령당선자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란 망언을 한다.
서울에서 민주당의 4월 6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는 많은 시민의 호응으로 대규모로 늘어난다. 시위에 놀란 정부는 휴교하고 깡패들을 동원해 막았다. 이날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담긴 신문기사가 나자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시위의 열기는 계속되었다. 18일 고려대 등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 및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며 경찰저지선을 뚫었다. 학생들은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연좌시위를 하다 고려대 선배 이철승 의원과 유진오 고려대 총장이 설득하자 늦은 오후 해산했다. 그러나 학교로 되돌아가던 중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정치깡패들의 습격으로 수십 명의 학생과 기자들이 길바닥에 쓰러진다. 이게 박마리아가 사주한 고대생 피습사건이었다.
이 소식은 주요 신문의 1면을 장식했고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거세게 들끓었다. 이튿날 아침 대광고가 앞장서자 서울대 문리과, 동국대, 성균관대, 연세대와 중앙대 등이 가세해 시위대는 10만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승만은 오후 1시 서울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러자, 주한미국대사는 학생 시위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미국 국무부도 주미한국대사에게 항의 각서를 보냈다. 경찰은 경무대 앞에 온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시작했지만, 시민들은 자유당 본부와 이기붕 집까지 점거했다. 이날, 전국에서 백여 명이 사망, 6천여 명이 부상했고 국민학교 학생 1명도 희생됐다.
20일에도 이승만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날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자, 21일 국무위원들이 총사퇴했고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이승만도 자유당 총재 사퇴를 고려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시민들의 분노와 시위의 열기에 휘발유를 붓는 격이었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 259명은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직접 요구한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교수단이 앞장서서 학생과 시민 등 1만여 명과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만세삼창과 애국가까지 제창했다. 교수 시위가 끝난 뒤에도 학생과 시민들은 통금 후까지 밤새 길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통금이 해제된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승만 하야’를 외치는 시위 군중은 10여만 명이 넘었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든 국민학생들과 유치원생들까지 보였다.
탱크를 앞세우고 출동한 계엄군은 경찰과 다르게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 불개입 원칙으로 무력 진압 없이 시위대와 대화했다. 시위 중 한 소년이 탱크 위로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를 외치자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도 있었다. 이후로 시민들은 계엄군을 만나면 환영하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계엄군은 더 이상 독재자 이승만이 아닌 정의를 원하는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
드디어, 4월 26일 계엄사령관의 주선으로 이승만은 학생, 시민대표 5명과 면담한다. 그제야 이승만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민심에 굴복한다. 오전 10시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이승만의 발표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주한미국대사는 사퇴 성명을 지지한다 발표했다. 시민들은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시민들은 ‘서대문 경무대’라 불린 이기붕의 집을 부수고, 파고다 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 목에 쇠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시민들은 질서를 지키자고 외쳤고 학생들은 시내를 청소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 제출을 거부했다. 권력을 놓기 싫어하는 늙은 독재자의 최후 몸부림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굴복했다.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됐고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 이승만이 물러나자 이승만과 자유당 추종자들은 다 도망갔다.
28일 새벽 이기붕, 박마리아와 이강욱과 함께 경무대에 숨어있던 이승만 양자이자 이기붕 장남인 이강석은 부모와 동생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자살했다. 그 날 아침 미국 정부는 그 가족의 망명을 허락했다.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하고 29일 잠시 갔다 온다며 몰래 하와이로 떠났다. 5·16 이듬해인 1962년 돌아오려 했으나 박정희 당시 의장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1965년 7월 망명한 하와이에서 91살로 병사했다. 파고다 공원 이승만 동상 자리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이기붕의 집터엔 4·19 혁명 기념도서관이 들어섰다.
박마리아는 일제강점기 말 김활란, 임영신,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만들어 전국을 돌며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고 일본군 강제위안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 친일활동을 했다. 미국 유학 중 만난 이기붕과 결혼했고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이승만 후처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얻는다. 출세와 명예 욕심이 많고 권모술수가 능해 이승만의 신뢰까지 받아 이기붕을 자유당 정권 이인자로 만들었다.
이기붕은 미국 유학한 덕에 해방 후 미 군정 통역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이승만을 만난 인연으로 그의 개인 비서, 대통령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국방부장관, 국회의장까지 지냈다. 마누라가 만들어준 그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이승만과 그를 찬양하는 ‘민족의 해와 달’이란 책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자식이 없던 이승만의 83살 생일에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선물한다.
이강석은 서울대 법대 부정편입으로 말이 많자 육사로 편입해 육군 소위가 된다. 4·19 혁명 직전까지 이기붕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은 후에 한글 학자가 된 한갑수이었다. 이강석은 종종 군복을 입고 비서실을 방문해 어려운 친구를 돕는다며 돈을 융통해 갔다. 그때마다 비서실장은 돈을 주며 다음부터 돈 문제는 부친께 직접 말해라 했다. 이강석은 지인들의 부탁을 잘 돕고 친구들에게 겸손했으며 대인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당시 시위 때면 연세대학생들은 당시 연세대 다녔던 이강욱과 한갑수 장남을 맨 앞에 세웠다.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로 근대식 박사학위를 받았고 뛰어난 웅변가이자 언론인이었다. 미주교포들의 성금으로 미국을 돌며 독립운동할 때는 자신을 대한제국의 왕자라 소개했다. 독립운동가였으나 상해 임시정부와 사상과 방법이 달랐다. 뛰어난 영어 실력과 외국의 인맥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일조도 했다. 이승만이 잘한 것은 독도 해역을 넘어오는 모든 일본 배를 나포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과오는 독선과 아집, 친일파 등용, 그리고 말년에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눈과 귀를 막은 무능한 현실감이었다.
당시 이승만이 백화점이나 시장을 방문한다면 이기붕의 지시로 미리 낮은 가격표를 바꿔 달고 동원된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행복하다고 환호했다. 그러면 이승만은 자신이 정치를 잘해 국내 물가가 안정되고 국민이 살기 좋은 줄 알았다. 50년 후 이명박이 재래시장에서 어묵을 먹으면 동원된 시민들은 환호하며 포옹했다. 박근혜가 시장을 깜짝 방문하면 동원된 시민들은 ‘반갑습니다’, ‘파이팅’ 등을 외치고 사진촬영과 악수를 요청한다. 그 시민들은 ‘일정’이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졌다.
해방 후 일제 앞잡이들을 등에 업고 약 12년간 대한민국 1, 2,3 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던 우남 이승만. 이승만의 정적인 백범 김구 선생은 암살당했고 죽산 조봉암 국회부의장은 날조된 간첩혐의로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뉴라이트와 한기총 등 수구세력들은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조선일보는 적극적으로 거들고 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라고 평했다. 그런데 수구세력들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동시에 반신반인화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를 매우 비판했고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꽤 강했다. 각 언론은 민주적 가치를 다룬 논설과 기사로 독자들의 눈과 귀를 열었다. 그래서 1955년부터 이승만은 언론 탄압을 시작했지만, 국민은 이미 민주주의를 알고 이승만 정권에 반감을 느낀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정한 근대화 기준 일간지 보급률이 100명당 10부였으나, 1961년 서울은 100명당 무려 25.5부 정도로 교육열이 왕성했다. 국민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고 문자 독해율도 80%까지 되었다. 교육과정에는 자유 민주주의 정신과 이상이 포함됐다. 당시는 대학생은 국내 최고인 미래 사회의 인재였다. 85개 대학에 대학생만 9만여 명이었다. 이는 당시 비슷한 국민소득의 다른 제삼세계 국가보다 매우 높은 비율이었다.
4·19 혁명 당시 시민이 거리로 나오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막 끝난 가난한 나라에서 인적 자원은 미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오던 때였던 만큼 교복을 입고 공부하는 중, 고, 대학생들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모든 것이 부족한 현실에 학생들도 배움에 대한 갈증이 많았다. 교육만이 신분상승의 기회였고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높았다.
1952년 더 타임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Expecting democracy to bloom in Korea is like expecting a rose to bloom in a trash can).’고 평했다. 그러나, 8년 후 대한민국은 4·19 혁명의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향상됐고 국민은 정의롭게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권력에 항거한 4·19는 1993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의의와 정신이 재조명되어”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4·19가 ‘의거’ 인지 ‘혁명’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 대한민국 헌법에 ‘… 4·19 민주정신을 이어받는다’가 들어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현재, 서울 강북구 419로에 위치한 국립 4·19 민주묘지에 민주열사 379기가 모셔져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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