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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NYT, 세월호 비극 또다시 조명

미 NYT, 세월호 비극 또다시 조명
– 오병환, 권미화 부부 사연 소개
– 독자 잃은 가정 70가정이라며 세월호 비극 부각

뉴욕타임스(NYT)가 11일 다시 한 번 세월호 문제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NYT는 동거차도에서 세월호 인양 작업을 지켜보는 세월호 유가족 오병환-권미화 부부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다.

오 씨 부부는 세월호 참사로 외아들 영석 군을 잃었다. 아버지 오 씨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죽었기에 돈 벌 이유가 없다”고 했다. 영석 군은 IMF 경제위기 때인 1997년 태어났다. 이 시기 부모들은 경제난으로 아이 하나만을 가졌고, 영석 군은 그중 한 명이다. 세월호 유가족 가운데 70가정도 오 씨와 비슷한 처지다.

NYT는 이 같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했다. NYT의 보도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세월호 참사가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드러낸다. 즉, 경제위기로 인해 아이를 하나만 낳아 키웠는데 그 아이를 잃었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NYT는 기사 말미에 여소야대로 세월호 유가족이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다고 적었다. 그 기대감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국민의 몫이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NYT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 Elizabeth

기사 바로가기 ☞ http://nyti.ms/1Ut0u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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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n Families Watch Ferry’s Salvaging, Hoping Truth Surfaces

진실의 인양을 기대하며 세월호 인양을 지켜보는 세월호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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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Byung-hwan, left, whose son died in the 2014 Sewol ferry disaster, is among the relatives of victims who have camped out on Donggeochado, South Korea, to monitor the ship’s salvaging operation. JEAN CHUNG FOR THE NEW YORK TIMES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오병환 씨(왼쪽)는 세월호 인양작업을 감시하기 위해 한국 동거차도에 야영 중인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이다.

By CHOE SANG-HUN
JUNE 11, 2016

DONGGEOCHADO, South Korea — Since last summer, Oh Byung-hwan has visited this island off southwestern South Korea more than a dozen times, camping out in a tent and braving monsoon rains and winter storms to watch the sea from a hilltop perch.

오병환 씨는 지난여름부터 한국 남서 해안에 위치한 이 섬에 열 번 넘게 드나들면서 장맛비와 겨울 한파에도 굴하지 않고 텐트 안에서 야영하며 언덕에 올라 바다를 감시했다.

Less than a mile away, a fleet of salvage ships float in a loose circle. Below them, resting on its side on the seafloor, is the 6,825-ton Sewol, a ferry that sank more than two years ago, taking with it 304 people, of which 250 were teenagers on a school trip, including Mr. Oh’s only child, Young-seok.

1마일도 안 되는 거리에 인양 선박들이 느슨한 원을 그리며 떠 있다. 그 배들 아래에는 2년여 전 침몰한 6825톤의 세월호가 해저에 측면으로 가라앉아 있다. 당시 사고로 희생된 304명 가운데 250명은 수학여행 중이던 10대 학생들이었고 오 씨의 외아들 영석 군도 그중 한 명이었다.

The catastrophe still haunts the families of the victims and remains a traumatic experience for South Koreans, many of whom still fault the government’s response to the disaster.

그 재앙은 여전히 희생자 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한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경험으로 남아있다. 국민 중 많은 수가 여전히 이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난한다.

Like most of the victims found huddled in the ship, Young-seok, 16, had listened to the crew’s repeated instructions — even when the ship was sinking — for passengers to stay in their cabins.

배 안에 모여있던 대부분의 희생자들처럼, 16살의 영석 군도 배가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도 승객들에게 선실 안에 머무르라는 직원들의 반복된 지시를 따랐다.

“Why aren’t they coming to our rescue?” Young-seok called from his tilting cabin, as seen on video footage recovered from the cellphone of another student victim.

다른 희생자 학생의 휴대폰에서 복구된 영상에서 영석이는 “왜 우리를 구조하러 오지 않는 거지?”라고 기울어가는 선실에서 말했다.

“We are here to monitor and record every move of the salvage operation, because we have learned not to trust what the government says, what it does,” Mr. Oh, 44, said from his hilltop tent, scanning the sea with binoculars and a large-lens digital camera and taking occasional notes in a logbook.

“우리는 인양작업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기록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다. 정부가 하는 말과 정부가 하는 것을 신뢰하지 말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고 오(44) 씨는 언덕 위에 설치된 텐트에서 쌍안경과 큰 렌즈가 달린 디지털 카메라로 바다를 살피고 일지에 가끔 기록하며 말했다.

I recently visited this island, catching a ferry from Jindo, the nearest island linked to the mainland by a bridge. Two and a half hours later, Donggeochado came into view, ringed by rocky cliffs. The island, home to 150 people, has no school, restaurant or hotel, and one ferry a day comes from Jindo.

나는 다리로 육지와 연결된 가장 가까운 섬인 진도에서 배를 타고 최근에 이 섬을 방문했다. 두 시간 반 후에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인 동거차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150명이 살고 있는 이 섬에는 학교, 식당이나 호텔은 전혀 없고 진도에서 하루 한 번 배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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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 Chang-deok, an activist, watching the salvaging operation through binoculars. JEAN CHUNG FOR THE NEW YORK TIMES
쌍안경으로 인양작업을 주시하는 최창덕 활동가

The island appeared deserted, except for a few old women mending fishing nets on the concrete roadside and old men idling outside a store without a signboard. Few people climbed the hill behind the village until the families of the Sewol victims began arriving. The yellow ribbons they tied to bamboo and camellia brambles along the overgrown path spoke of their pain. “My dear child, please come visit me in dreams,” read one.

콘크리트 길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나이 든 몇 명의 여성들과 간판도 없는 가게 밖에서 한가롭게 있는 나이 든 남자들을 제외하고는 섬은 황량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마을 뒤 언덕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풀이 제멋대로 자라 덮은 길을 따라 대나무와 동백나무에 묶인 노란 리본들이 그들의 고통을 대신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 제발 꿈속에라도 찾아오렴” 한 리본에 적혀 있다.

They began coming last summer, when a consortium of Chinese and South Korean salvage companies began a $73 million operation to raise the Sewol. The victims’ families hope that the salvaging, expected to be completed this year, will yield the bodies of nine missing people and more clues to what happened — a question that many suspect the government of President Park Geun-hye has been evading.

세월호 유족들은 중국과 한국 인양업체 간의 컨소시엄이 세월호를 인양하는 데 7300만 달러 작업을 시작했을 때인 지난여름부터 오기 시작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올해 완료될 것으로 기대되는 인양을 통해 9명의 미수습자들을 거두고 많은 이들이 박근혜정부가 회피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사건의 진상에 대한 더 많은 단서를 찾기를 기대하고 있다.

The families come to the island to make sure that nothing is covered up, taking shifts in a tent used as a watching post in the hills above the salvage operation. Two other tents serve as sleeping quarters.

유족들은 인양작업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감시초소처럼 사용되는 텐트에서 교대를 해가며 어떤 것도 감춰지지 않도록 하려고 섬에 오게 되었다. 다른 두 개의 텐트는 잠자리용으로 사용된다.

“The government never told us everything, and is more interested in covering it up than in learning the lessons to make the country safer for children,” Mr. Oh said.

“정부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전혀 말해주지 않았고 아이들을 위해 나라를 더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교훈을 얻기보다는 덮어버리는 데에 더 관심이 있다”고 오 씨는 말했다.

The operator of the Sewol, Chonghaejin Marine, routinely overloaded the ship with poorly secured cargo, and had done so on the ferry’s final voyage, prosecutors said. Inspectors colluded in the practice by giving the Sewol and other ships a cursory check from the pier, or none at all, the authorities said.

세월호의 운항사인 청해진해운은 상습적으로 배에 과적하고 화물을 대충 고정했는데, 검사들에 따르면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검사관들이 세월호와 다른 배들을 부두에서 대충 확인하거나 전혀 검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실질적으로 공모했다고 밝혔다.

When the Sewol capsized, its crew members were among the first to flee. The first coast guard boat that arrived at the scene did little more than pick up the fleeing crew members, while passengers trapped inside the ferry banged on the windows as the ship slowly disappeared beneath the waves.

세월호가 전복되었을 때, 세월호의 선원들은 가장 먼저 달아났다. 세월호가 서서히 파도 아래로 사라지는 동안 안에 갇힌 승객들이 창문을 두들겼지만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보트가 한 일이라고는 빠져나온 선원들을 배에 태우는 것 말고는 없었다.

The lieutenant who captained the coast guard ship was given a three-year prison sentence for lying that he had used a megaphone to tell passengers to evacuate.

해경 구조선을 지휘했던 정장은 승객들의 대피를 메가폰으로 지시했다고 거짓말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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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on Mi-hwa, Mr. Oh’s wife and the mother of Young-seok, who died at 16 in the ferry disaster, in a tent overlooking the salvage operation. JEAN CHUNG FOR THE NEW YORK TIMES
오 씨의 부인이며 세월호 참사 당시 16세로 죽은 영석의 엄마인 권미화 씨는 인양 작업을 감시하는 텐트에 있다.

The disaster united South Korea in anger and sorrow. But as the families and their supporters persisted in their campaign for a more thorough investigation into the government’s responsibility, the issue became increasingly politicized.

그 참사로 한국은 분노와 슬픔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정부의 책임에 대해 보다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운동을 지속하자 이 이슈는 더욱 정치화되었다.

Right-wing activists likened critics of the government to a “pro-North Korean” force that threatened to undermine Ms. Park’s government. They argued that the authorities had done enough by reprimanding officials and tightening safety regulations.

우익의 활동가들은 정부의 비판자들을 박근혜정부를 약화시키려고 위협하는 “종북” 세력이라고 일컬었다. 그들은 정부가 책임자 처벌과 안전 규제 강화에 있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Fifteen crew members were sentenced to one and a half years to life in prison. Several shipping company officials were given two- to seven-year sentences.

15명의 선원들은 1년 반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선박 회사의 여러 직원은 2년에서 7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Pro-government activists also called the bereaved families “dealers of corpses” looking for greater financial compensation and said their demands had “wasted taxpayers’ money.” They even mocked a victim’s father on a 46-day hunger strike in central Seoul by organizing a binge-eating festival nearby.

정부 측의 활동가들은 또한 유족들을 더 큰 금전적 보상을 바라는 “시체 장사꾼”들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요구가 “납세자들의 돈을 낭비한다”고 했다. 그들은 또한 서울의 중심지에서 46일째 단식투쟁을 하고 있던 피해자의 아버지 근처에서 폭식 축제를 열어 그를 조롱했다.

“The Sewol incident exposed the worst naked face of South Korea,” said Kwon Mi-hwa, Mr. Oh’s wife. She was keeping her husband company in the mosquito-infested tent on a recent evening.

“세월호 참사로 한국은 최악의 민낯을 드러냈다”고 오 씨의 부인 권미화 씨는 말했다. 그녀는 최근 저녁 모기로 가득 찬 텐트에서 그녀의 남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For months after the sinking, Young-seok appeared in my dreams as the little boy he was when he protested my going to work in the morning and tugged at my pants,” she said, choking with tears. “Sitting alone on this hill, I sometimes wonder whether he is talking to me through the birds chirping around me.”

“침몰 수개월 후, 영석은 내가 아침에 출근할 때 떼쓰면서 바지를 잡아당기던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꿈에 나타났다” 그녀는 눈물로 목이 메이며 말했다. “이 언덕에 혼자 앉아있자면, 가끔 영석이가 내 주위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통해 내게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곤 한다.”

The teenagers who died were born when South Korea was engulfed in the Asian financial crisis of the late 1990s. Soon after Young-seok’s birth, Ms. Kwon found a job at a pharmaceutical factory to help augment her husband’s meager wages from a textile factory. In their working-class neighborhood in Ansan, south of Seoul, many families had just one child because of the rising cost of education. In the Sewol disaster, 70 families lost their only child.

죽은 10대들은 1990년대 말 한국이 아시아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을 당시 태어났다. 영석이가 태어난 직후 권 씨는 방직공장에서 받는 남편의 쥐꼬리만한 월급에 보탬이 되고자 제약공장에 취업했다. 서울 남쪽 안산의 노동자 계층에서 많은 가정들이 치솟는 교육비 때문에 한 아이만을 가졌다. 세월호 참사 때 70 가정이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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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Kwon and and Mr. Oh near tents overlooking the salvaging. JEAN CHUNG FOR THE NEW YORK TIMES
권 씨와 오 씨가 텐트 근처에서 인양작업을 바라보고 있다.

Not long after Young-seok died, a despondent Ms. Kwon screamed at her husband: “Bring my child back! I don’t care if you have to die for it!”

영석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낙담한 권 씨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 아이 데려와! 당신이 죽어도 상관없으니 데려와!”

Mr. Oh quit his job. For one and a half years, he joined other families camping out in central Seoul.

오 씨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그는 서울에서 다른 가족들과 천막농성에 합류했다.

“Now that my son is gone, I can’t see why I have to make a living,” he said. “I can’t go on with my life until the full truth is known about why and how my son died, until the government is made to take responsibility it has refused to take, until human lives are recognized as more valuable than profits in this country.”

“아들이 갔으니까 난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난 내 아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모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정부가 거부해온 책임을 다할 때까지, 이 나라에서 이윤보다 사람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 인정될 때까지 내 삶을 여기에 바치겠다”고 오 씨는 말했다.

Mr. Oh said his hopes had risen after Ms. Park’s ruling party lost a majority in the parliamentary elections in April.

오 씨는 4월 총선에서 박근혜의 집권당이 의회 과반을 잃은 이후 희망이 커졌다고 말했다.

Months of life on the streets have taken a toll on Mr. Oh’s health. Still, during the election, he campaigned for hours every day for a human rights lawyer who championed the families’ cause. The lawyer won a parliamentary seat by beating a former presidential aide of Ms. Park.

거리에서 수개월 간의 삶은 오 씨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지만 선거기간 동안 그는 유가족들 편에 서서 일해온 한 인권변호사를 위해 매일 몇 시간씩 선거운동을 했다. 그 변호사는 박근혜의 전 보좌관을 이기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Mr. Oh’s wife also became a full-time activist, passing out leaflets about the Sewol disaster. The couple live off the savings for their son’s education and funds pooled together by families and supporters to pay for equipment and expenses.

오 씨의 부인 역시 세월호 참사에 관한 전단지를 돌리며 전업 활동가가 되었다. 두 부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아둔 돈과 장비 및 경비 부담을 위해 가족들과 지지자들이 함께 모은 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The few nights Ms. Kwon spends at her home, she sleeps with a portrait of her son beside her. She still pays to keep her son’s cellphone number active. On May 5, Children’s Day, she texted him: “My dear only child, I am sorry.”

권 씨는 집에서 며칠 밤 보내면서도 아들의 사진을 옆에 놓고 잠을 청한다. 권 씨는 아직도 아들의 휴대폰 비용을 내고 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권 씨는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나뿐인 내 사랑하는 아들, 미안하다.”

On Jan. 12, the day her son would have graduated from Danwon High School in Ansan, she visited the school alone at night. All but one of her son’s 32 classmates had died. Their classroom had been turned into a temporary memorial, its desks overflowing with flowers, chocolates and letters.

1월 12일, 권 씨의 아들이 안산 단원고등학교를 졸업했어야 할 그 날, 권 씨는 밤에 혼자 학교를 찾았다. 아들 반 32명 중의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교실은 임시 추모교실로 바뀌었다. 교실 책상들은 꽃과 초콜릿, 그리고 편지들로 가득 찼다.

“My dear son, thank you for letting me know what happiness was,” Ms. Kwon wrote in a letter that night. “I will find out why you had to die. I can. I will. Because I am your mother.”

그 날 밤, 권 씨는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아들, 행복이 뭔지 알게 해줘서 고마워. 엄마는 네가 왜 죽어야 했는지 꼭 밝힐 거야. 할 수 있어. 꼭 할 거야. 난 네 엄마니까.”

[번역 저작권자: 뉴스프로, 번역 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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