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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 2

(38) 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 2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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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북한은 9월 조선노동당 평남지구 확대위원회에서 채택한 ‘강령’으로 친일청산을 시작한다. 일본인, 친일 조선인 및 반동 지주가 소유했던 공장, 광산, 토지 등을 몰수해 국유화한 것이다. 청산을 사회주의 국가건설의 필수과제로 규정해 친일파의 범위를 유산을 상속한 그 후손들도 포함한 인적 청산이었다. 북한 곳곳에서 인민재판을 통해 유죄를 받은 친일혐의자들은 대부분 소련군에 넘겨져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7년부터는 북한 정권의 법집행기관을 통해 친일파들에게 징역과 사형도 집행되었다. 북한의 청산방법은 법률기구가 아닌 인민재판과 같은 사회주의 특유의 제도로 진행됐고 특히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거나 공출, 징용, 징병, 일본식 성명 강요에 앞장선 자들에게 중벌을 내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거물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벌써 재산을 들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따라서 북한의 친일청산도 완벽하지 못했으나 괴뢰정권수립 이후 제도적으로 친일파 청산을 꾸준히 지속했다. 역사학자 정운현의 저서 ‘친일파는 살아 있다’를 보면,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남북한 정권 모두의 시대적 과제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남한의 미국 군정과 달리 친일파 배제원칙 하에 반일세력이 권력의 중추가 되도록 지원했다. 남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친일청산이 계획됐으나 패망 일본과 비밀리에 협의 하에 친일파를 등용하는 미 군정 때문에 3년간은 손도 대지 못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도 반민법 제정 단계에서부터 반대하다가 결국은 반민특위마저 해체했다.

신채호 선생 기념 사업회 이건흥 사무처장에 따르면, 2차 대전에 패한 독일을 반으로 나누고 탈산업화를 통해 전쟁을 못 일으키게 하였다. 이때 소련은 독일의 군수물자와 과학자들을 끌고 가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의 핵무기 독점시대는 끝났고 소련과 군사적 대결이 시작됐다.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의 국제과학자협회 공식 조사단이 1952년 작성한 니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도 일본의 항복을 받으며 731부대장으로부터 잔인한 생체실험과 생화학 무기를 개발한 기술을 건네받아 후에 한국전쟁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전문가인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 미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전쟁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 따르면,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군사고문단 600여 명만 남기고 남한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1950년 1월 12일 미 에치슨 국방장관의 ‘애치슨 라인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엔 중공과 소련에 위협받는 한국과 일본을 보호하는 핵우산에서 한국을 제외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 1950년 4월 10일 김일성은 소련에 한국전쟁에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과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를 우려한 스탈린은 중공을 제안했다.

그해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중공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모택동은 10만 명의 군대를 북한 국경으로 보낸다. 기밀 해제된 50년 전 미국외교문서의 내용이다. 당시 미국은 첩보활동을 통해 중공과 북한 간의 대규모 병력이동 등을 알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다. 한편 UN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등은 일본의 경제개발을 막고 한국 등 아시아 전쟁피해 국가에게 배상하도록 대일본정책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1951년 9월 8일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의 공산화를 막는다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SF Peace Treaty)을 체결한다. 그리고 일본의 군수산업을 부활시켜 세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단기간 빠르게 경제가 부흥한 일본은 1964년 아시아 최초로 도쿄하계올림픽게임을 개최했다. 일본이 패망한 지 19년 만이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쟁이 일어났다. 일요일 새벽 38도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남침한 것이다. 이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공산·반공 두 진영으로 갈라져 폭발한 복잡한 사건이었다. 때마침 한국군은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국방부 수뇌부들은 밤새워 술 파티를 즐겼으며 사병들은 모내기 등으로 대다수가 외박 중이었다. 당일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면공격은 아니다. 서울 사수를 공언한다. 명령만 내리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비상시국에 국방부 장관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의 보좌관은 ‘장관 각하는 일요일은 그 어떤 전화도 안 받습니다!’라고 했단다. 어쭙잖은 서양습관이었다.

그 국방부 장관이란 자가 신성모였다. 대한민국 2대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이승만이 말할 때마다 감명받듯 울어대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 불렸다. 그는 경술국치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옥살이도 했고, 영국에서 해양대학을 마치고 일등 항해사로 상선에 근무했었다. 원래 그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반대했으나 1948년 귀국 후 이승만 편이 되어 내무부장관, 대한청년단장 등을 거쳐 국방부 장관이 된다. 그는 급조단체 대한청년단장일 때 선언문에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고 썼다. 군 경력이 전혀 없었던 신성모는 “국군은 대통령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망언을 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북한이 남한이 북침설을 주장하는 빌미가 됐다.

6월 27일 신성모와 대전으로 도망간 이승만은 저녁 7시 충남도지사 사저에서 미리 녹음한 육성을 밤 10시 라디오로 방송해 ‘육군이 38선 부근에서 승리하며 북진하고 있다. 국민은 군과 정부를 믿고 동요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며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다. 그러나, 우왕좌왕하며 도망가기 바쁜 군 수뇌부는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한다며 아무런 경고 없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했다. 많은 피난민 행렬이 인도교를 건너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폭파하니 당시 철교 위에 있던 차량 50여 대가 강물로 쳐박히고 시민 800여 명이 익사하거나 폭사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정권이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증명한 것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남쪽으로 피난길이 막힌 서울시민 대부분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적 치하에 갇힌다. 김규식 등의 저명인사들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은 제대로 피난도 못 갔고 적 치하 서울에서 많은 사람이 납북되거나 학살당했다. 한강 이북 서부전선에서 싸우던 부대들은 한강 다리가 폭파돼 후퇴할 수 없어지자 전투 의지를 잃고 와해해 뿔뿔이 흩어진다. 북한은 이들을 잡아 투항한 포로들이라고 선전했고 신성모는 그 책임을 채병덕과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분노한 여론을 잠재울 희생양으로 군법회의를 소집해 명령을 따른 공병감을 적진비행 죄로 총살한다. 이승만이 쫓겨난 후 1962년 유족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최창식 대령의 명예는 회복되었으나 이미 억울하게 죽은 지 12년이 지났다.

무방비상태였던 중부와 호남지방은 한지가 물에 젖듯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계속 밀리며 낙동강 전선이 마지막 교두보가 되자, 이승만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상황이 악화하면 제주도나 일본 야마구치 현으로 도망가 망명정부를 세울 궁리까지 한다. 당시 부산엔 임시정부부처와 UN군 외에 전국에서 밀려온 피난민 등이 뒤섞여 산등성이까지 움막, 판잣집 등이 들어섰다. 학생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천막 학교 등에서 배움을 이어갔지만, 그 와중에도 밤이면 카바레에서 서양음악에 맞춰 춤추고 양주 마시며 뒤엉킨 남녀들이 있었다. 일부 정부 고위 관료들과 돈 있는 부류들은 낮에는 부산 시내에서 전황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밤이면 부산항에 정박시킨 통통배에서 잠을 자며 여차하면 일본으로 튈 궁리를 했다. 전세는 더 암울해져만 갔다. 대통령부터 하급자까지 싸우기보다 도망갈 생각을 먼저 했기 때문이다.

같은 하늘 아래 북한군 치하의 수많은 국민은 고통받고 양측에 학살당했고 전선에서는 빈약한 장비뿐인 국군장병들이 북한군에 대적하며 목숨을 내던졌다. 7월 1일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 1개 대대가 참전했지만, 이 최초 미 지상군은 오산전투에서 북한군에게 참패한다. 북한군이 미군만 보면 도망갈 것이라 자만한 게 큰 오산이었다. 국제 사회는 이 신생 독립국의 내전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국제연합(UN)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 제82호는 더글러스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UN군을 조직 한국으로 파병한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터키, 룩셈부르크, 벨지움, 콜롬비아, 태국, 필리핀, 에티오피아, 남아공 등 16개 전투지원국. 인도, 이스라엘,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의료지원국과 중화민국(대만)을 비롯한 40여 개국이 넘는 물자지원국이 이름도 생소한 동아시아의 신생 독립국을 돕기 위해 국제연합깃발 아래 뭉쳤다. 북한은 중공과 소련이 전투를 지원했고 폴란드 등 당시 공산 국가들이 의료를 맡았다. 국제사회는 명백히 북한이 남침한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북한군이 한반도 남쪽에서 즉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군과 UN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이나 수많은 인사들이 또 납북됐다. 이승만 정권은 납북된 인사들을 ‘자발적으로 월북한 빨갱이들이다.’선전한다.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했으나 중공의 참전으로 다시 작전상 후퇴하게 된다. 피난민들도 군인들과 뒤섞여 따라 남으로 향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도입부였던 흥남철수는 그중 하나였다. 당시 ‘쌕쌕~’하는 굉음을 내고 날아가는 호주(오스트레일리아)공군의 전투기를 사람들은 ‘쌕쌕이’이라고 불렀다. 큰 활약을 하며 제공권을 장악한 이 비행기가 보이면 사람들은 이승만 처가에서 보내준 비행기라고 손뼉 치고 이승만을 환호했다. 그러나, 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와 이승만 부인인 ‘프란체스카’의 모국인 유럽 북부의 오스트리아(Austria)를 혼동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했다. 그래서, 암시장에서는 미군 비상식량과 군복 등이 공공연히 거래되었다. 중고 군용모포는 아이들 옷감으로 재활용됐고 군복은 튼튼해서 남자들에게 인기였다. 등판에 흰색 페인트로 크게 ‘POW’라 쓰인 작업복은 값도 싸 노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한 사내가 어렵게 돈 모아 그 작업복을 사 입고 부산 시내를 활보했다. 지나가던 미군 지프가 멈추더니 미군 헌병이 사내를 불러 세운다. 주위에 심심해하던 사람들이 몰려든다. 헌병이 영어로 뭐라 하는데 ‘예스!’라 하자 얼른 지프에 타라고 손짓하기에 ‘땡큐!’하고 웃으며 올라탔다. 유일하게 아는 영어단어였다.

지프는 포로수용소로 내달렸다. 헌병이 영어로 물어본 건 ‘너 탈출한 포로지?’였다. 그렇게 오해받아 붙들려간 사내들이 많았단다. 당시 암시장에서 파는 POW라고 찍힌 그 사내가 입은 작업복은 전쟁포로(Prison Of War)에게 입히는 옷이었으나 상인들이 팔려고 군부대에서 몰래 빼낸 것이었다. 전쟁 끝 무렵이었던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한국 정부와 한국군은 UN군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북한 출신 반공포로를 기습적으로 석방했다. 한국군, 경찰과 시민들은 탈출한 포로들을 숨겨주고 보호했고 공산군 포로의 수용과 감시를 맡던 미군과 UN군은 탈출한 포로를 잡으러 다녔다.

38 도선에서는 땅 한치라도 더 차지하려는 한국군, UN군과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한 지 3년 1개월 2일 만인 1953년 7월 27일 서류상으로 한국휴전협정이 체결되며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절대적으로 미군에 의지한 상태였기에 UN군의 주축인 미군이 서명한 이상 한국군 단독으로 전쟁할 수도 휴전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많은 국민은 북진통일을 못한 걸 아쉬워했고 UN(국제연합)군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 인민지원군은 협정에 서명했다. 따라서 이 휴전협정은 남북한 간에 휴전을 합의한 것은 아니고 현재까지 북한이 미국과 군사회담에서 한국을 제외하려는 빌미를 주고 있다.

미국의 소리(VOA)에 따르면,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여 명, 부상자 45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여 명,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여 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여 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60만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 명, 실종자 79만 6천 명,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 52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 80만 명,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여 명, 부상자 48만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여 명, 중공군 사망자 13만 6천여 명, 부상자 20만 8천여 명, 실종자와 포로, 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97만 3천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한국 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이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1/5이 피해를 보았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줬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보았다. 한국 전쟁은 근대 국제 체제가 형성된 1,500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전쟁 가운데 전사자가 일곱 번째로 많았던 전쟁이다. 발발한 지 6년만인 1945년 9월 종식된 ‘2차 세계대전’과 1955년 11월부터 20년간 지속한 ‘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인 이 한국전쟁(Korean War)을 미국과 서구에서는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또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부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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