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차카게 살자!
S. Mach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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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초의 문신 기록은 중국서사인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서 찾을 수 있다. ‘마한의 만자들이 때때로 문신하고 변지인들도 남녀가 왜와 같이 문신한다’고 했다. ‘고려도경’에도 ‘동이의 풍속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는데 야만족 만맥잡류蠻貊雜類도 이마에 문신한다.’라 적혀있다. 중국 주나라 때엔 범죄자, 천민, 전쟁포로들의 얼굴에 문신해 구별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려도 강도를 잡으면 얼굴에 강도強盗라는 문신을 새겼다. 경국대전에도 절도범 얼굴에 글자를 새겼다 한다. 묘청妙淸의 난 때는 관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자들 얼굴에 ‘서경역적西京逆賊’을 먹으로 새겨 노비로 삼았다.
자자형刺字刑은 중국 고대의 형벌 가운데 하나로 천형이자 저주였다. 당시 형벌은 현재와 달리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무서운 육형肉刑이었다. 먹으로 몸에 죄명을 문신하는 묵형墨刑, 죄인의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宮刑, 목숨을 빼앗는 사형死刑과 함께 ‘오형五刑’이었다. 육형은 한나라 문제文帝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지만, 자자형은 오대五代 시기에 부활했다. 그렇지만 모든 범죄자에게 문신 형벌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문신하는 부위도 명나라 법전 ‘대명률大明律’에 팔꿈치와 팔목 사이, 즉 팔뚝에 자자하는 것으로 규정했으나 실제로는 팔과 얼굴 등 안면에 글자를 새기곤 했다.
조선 시대엔 부모님이 물려준 몸을 훼손하지 않는 유교적 관념이 있던 때다. 곡식을 훔친 자에겐 오른팔에 도관전盜官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창탈搶奪, 초범에는 절도竊盜를 새겼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록에 의하면 경형黥刑, 묵형이라고 불리는 자자형은 강 절도범들의 얼굴과 팔뚝에 죄명을 문신文身하는 벌이었다. “경鯨을 칠 놈”이라고 욕도 여기서 유래된 말로, 평생 이마에 문신하고 살아갈 놈이라는 저주의 말이다. 연산군 때 알아보기 쉽게 남자 노비 왼뺨엔 도노逃奴, 여자 노비 오른뺨엔 도비逃婢을 새겼다. 문신은 범죄자와 가장 천한 노비가 도망가지 못하게 많이 한 징벌이었다.
죄인을 문신할 때 여러 개의 바늘로 살갗에 상처를 낸 후 먹물을 문질러 헝겊으로 그 부위를 싸맨 후에 며칠간 옥에 가두었다. 이는 먹물이 피부 깊숙이 들어가고, 죄인이 씻어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자주색이나 검은색 식물즙이나 먹물로 색을 냈다. 문신하는 글자의 크기는 사방 반 뼘 내외로 하였고, 새겨 넣는 글자의 획의 넓이까지도 법전에 정해두었다. 세종과 판부사 허조許稠는 70세 이상 노인, 15세 이하 어린이, 여자와 군인에게는 고통이 심하고 평생 낙인이 되는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또한, 중죄를 진 양반 관료들도 실제 자자형이 집행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범죄자는 얼굴에 먹으로 문신하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집안 경조사에 갈 수도 없고 길에서도 알아본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가족까지 마을에서 따돌림당했다. 장사를 해도 아무도 안 사니 사대문 외곽에 땅을 파 움집을 짓고 백여 명이 모여 구걸하고 거지로 살았다. 이렇듯 인간적인 삶을 박탈하는 자자형은 조선 후반 신분사회가 급변하고 도망가는 노비가 많아지고 뇌물이 횡횡하며 줄었다. 숙종, 경종, 영조 때 돈 많은 천민이 양반으로, 몰락한 양반은 천민으로 신분사회가 붕괴하며 노비나 범죄자도 그 굴레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종 때 박어우동朴於宇同이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왕족 이동의 아내였으나 아들을 못나 소박 받았는지 이동이 첩을 들였는지 하여튼 쫓겨나 기생으로 살며 수십 명의 선비 유생들과 바람이 난 스캔들 주인공이다. 당시 야사는 대동야승,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기록으로 자세히 남아 있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내 성인나이트에서는 지금도 어우동 쇼가 인기다. 봉건적 억압된 문화 속에서 질퍽한 성 추문에 결국 어우동은 사헌부에 잡혀간다. 어우동은 관계한 남자의 이름을 팔목과 허벅지에 문신으로 남겼고, 그 이름들이 증거가 돼 수십 명의 양반 관료들이 사헌부에 끌려가 처벌받았으나 어우동이 사형당한 후 모두 사면 복권된다.
남녀칠세부동석이지만 당시에도 몰래 정을 통해 온 남녀연인이 서로의 팔뚝에 사랑의 정표를 문신하는 게 성행했다. 후에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이것을 ‘연비聯臂’라 소개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명종 10년 양양의 김수영金壽永이란 효자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그는 부모가 죽자 3년간 다른 음식은 안 먹고 죽만 먹으며 자기 손으로 좌우 무릎에 스스로 하늘에 맹세하는 글 132자를 문신으로 새겨 부모님을 향한 효를 다짐했다고 한다.
서기 330년경 콘스탄틴 대제는 얼굴에 문신 새기는 행위를 금지했고, 787년경엔 신체에 새기는 것도 금지했다. 로마 시대엔 사병들 손에 문신했고, 노예와 검투사들 이마에 ‘세금완납’과 ‘도망자’란 문신을 새겨 도망 못 가게 했다. 문신을 즐겼던 아시아 보르네오 이반족, 일본의 아이누족, 타이완의 아타얄족, 트루쿠족, 사이시얏족, 북아프리카의 하우사족, 요루바, 훌라니족 등을 통해 문신 문화는 여러 세기에 걸쳐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물감을 넣다’란 이레주미いれずみ와 ‘직접 조각하다’의’테보리てぼり 등 일본 문신의 일종인 ‘호리모노ほりもの’는 유명하다. 예전엔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애첩인 게이샤의 신체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는 게 유행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문신을 금지했지만 70년 후 1948년 일본 내 문신은 합법이 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谷崎潤一郞의 유명한 단편소설 ‘문신刺靑’을 보면 문신 행위를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 범죄집단 야쿠자의 조직원이 초등학생에게 문신으로 위협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2012년 6월 오사카 시청직원 중 문신 있는 자는 문신을 가리던지 지워야 하는 새 규정이 시 조례에 포함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엔 ‘문신Tatoo는 “그리다, 찌르다.” 등 18세기 폴리네시안 어 Tataow에서 온 외래어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타타우Tataow’는 남태평양 타히티, 통가, 사모아 등 폴리네시아 말로 ‘솜씨 있는’ 의미다. 유럽의 문신 역사는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세 번이나 방문했던 남태평양에서 시작된다. 1768년 쿡 선장은 몸에 문신한 남태평양 원주민소년 오마이Omai를 유럽으로 데리고 와 잉글랜드 정부와 조지 왕King George에게 바친다. 그 후 최초 리버풀Liverpool 항구에 문을 연 문신기술자의 주 고객은 선원, 범죄자, 하층민 등이었다. 그러나 곧 유행을 타며 상류층, 귀족들이 주 고객이 되며 수요가 몰리자 문신 가격이 폭등했다.
당시 전 세계의 항구에서는 선원들을 위한 문신업자들을 부족했고, 북미에서는 초보자 일본인과 폴리네시아인 문신업자도 돈을 꽤 모았다. 최초로 뉴욕 시에 문신가게를 연 독일계 이민자 마틴은 독립전쟁 당시 대륙을 돌며 남국과 북군 장병 모두에게 문신을 해줘 떼돈을 번다. 전쟁이 끝나자 문신은 상류층 젊은이들의 필수 요건이 된다. 손바닥만 한 문신 하나도 노동자 봉급 몇 달 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나고 문신 기계가 발명되자 문신이 더욱 쉽고 대중적이 되며 가격도 전에 비해 낮아진다.
나치는 유럽에서 유대인들을 수용소에서 통제하기 위해 팔에 등록번호 문신을 새겼다. 2차대전 중 독일 나치 친위대원Waffen-SS들은 그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혈액형끼리 팔에 문신을 했다. 물론 패망이 가까워지자 친위대원들은 자신의 팔에 총을 쏘고 칼로 긁어 수두나 상처처럼 보이게 했으나 문신은 안 지워졌고 증거가 되어 발각되어 체포되고 처벌받았다.
코만치Comanche 등 북미 인디언들도 문신으로 자기네 부족과 전설을 표현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자랑인 모코Moko 문신은 남녀의 얼굴에 그들의 조상, 지위, 계급 등을 나타낸 것으로 영혼과 내세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문신은 죽어서도 자신의 영혼을 지켜준다고 그들은 믿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문신은 육체가 상하고 불에 타도 남겨져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소유한 가축을 구별하고 재산으로 구별하려 문신을 새겼으나 물감이 아닌 귀, 등판 등에 뜨거운 쇠로 낙관을 지졌다. 한시적인 헤나Henna문신은 12세기경 고대 인도에서 유래했다. 힌두교식 염색법으로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중동 등에서 유래해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있다.
문신은 군인들의 동반자다. 군인들도 문신을 통해 자신의 부대, 참전, 전투 중 사살한 숫자 등을 표시한다. 문신은 반역자나 범죄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경찰들이 범죄인을 잡으면 옷을 벗겨 문신 사진을 찍는 이유는 용의자 구별과 문신을 통해서 그 범죄자의 단체가입, 범죄경력, 특이사항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감옥의 죄수들에게 문신은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다. 문신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전과가 더 많고 인종차별을 한다는 의견도 있다. 미국 예로, 오토바이 갱단과 죄수들이 일반인들보다 문신이 더 많다고 한다. 또 특유의 문신을 통해서 자신의 범죄경력과 실형, 죽은 동료 등을 나타낸다. 문신의 소재는 여러 함축된 의미가 있다. 목에 있는 단검은 같은 죄수를 살해했거나 청부살해 하는 사람이다. 사형집행인, 해골은 살인자, 거미줄은 기획 마약 단속에 잡힌 자, 묘비는 숫자에 따라 실형 산 햇수 등이다.
영국 출신 인류학자 H 링 로스에 따르면 문신 방법은 약 1,900여 개로 나뉜단다. 그 중하나, 닭 피 문신이라고 있다. 닭 피를 사용하는 건 사람의 몸에 다른 종의 피가 들어가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어 위험하다. 닭 피 문신의 특징은 평소에는 안보이다가 술을 마시거나 몸에 열이 나면 닭 피가 들어간 글자나 그림이 벌겋게 나타나는 효과가 있다. 반흔문신은 칼 등으로 원하는 모양의 흉터를 화학약품으로 문신을 새기면 일반문신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다량의 화학성분에 심각한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 한 문신예술가는 인체에 해가 없는 특수잉크를 미국 FDA승인받아 어두운 곳이나 클럽에서는 확실히 보이는 야광 문신을 개발했다.
문신 스튜디오에 가면 시술 시 발생하는 사항들 상담하고, 원하는 디자인을 결정하고, 원하는 신체위치에 마취 크림을 바르고 밑그림 위에 기술자가 기계로 시술하고 바셀린이나 연고를 바르면 끝이다. 가격은 결코 생각보다 싸지 않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태국, 필리핀, 캄보디아, 동유럽 등으로 문신여행을 가는 서구청년들이 많다.
문신은 피부에 날카로운 송곳이나 동물의 뼈로 상처를 낸 후 물감, 먹물, 동물의 피, 재 등을 넣어 그림이나 글자를 새긴 것이라 지우기 불가능하다. 예전에는 문신업자가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문신을 했지만 새롭게 발명된 문신 기계의 바늘은 1초에 80~150번 움직이니 그만큼 빨라지고 가격도 내려갔다. 외국의 정식 문신업자들은 정기적인 교육도 받고 바늘은 일회용이고 장비는 멸균해야 하고 항상 위생 장갑을 끼고 문신 전후 자신의 손을 항상 청결하게 해 감영과 알레르기를 예방한다. 문제는 몰래 비공개로 하는 문신은 재사용하는 열악한 장비로 인해 감염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형무소 등은 고무판, 검댕, 재, 소변 등에서 비위생적으로 색을 추출해 인체에 중대한 해를 줄 수 있다.
2008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18세~60세 사이 성인 중 문신한 자는 14%로 남성이 여성보다 조금 많단다. 호주와 러시아 30세 이하의 20%도 신체에 문신이 있다고 한다. 현대 서구사회에서 문신은 남녀 모두에게 유행의 한 분야라고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추세다. 미용 문신은 오래전부터 대중화되었다. 눈썹, 입술 등에 자연스러운 색상을 넣고 사마귀 등은 제거한다. 일부 국가에선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들 팔목 등에 이름과 주소 등을 문신한다. HBO, Redbull 등 많은 대기업에서 문신을 광고의 새로운 방법인 ‘스킨버타이징Skinvertising’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미국 한 바비큐 식당은 잘 보이는 신체 부위에 자사 로고를 문신하면 평생 공짜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홍보했고, 현재 9명이 그 식당에서 평생 공짜 음식을 먹고 있단다.
대한민국에서 문신은 역시 범죄자들의 상징이었으나 몇 년 전부터 유명 운동선수, 연예인 등의 한 패션 수단이지만 아직은 부정적이 지배적이다. 얼굴과 종아리를 제외한 몸 전체에 문신해 입대 후 귀가 조치된 20대가 병역기피로 1년 넘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우나, 찜질방, 대중탕, 물놀이공원 등에서 문신을 노출, 과시하고 활보해 불안감과 혐오감을 조성하면 경범죄처벌법의 불안감 조성규정을 적용해 과태료를 내야 한다. 국내법은 아직까지 감염을 막고 건강을 위해 면허 있는 의사만이 시술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내 대부분 문신업자는 입소문에 의지하며 간판도 없이 소규모로 법망을 피해 문신을 팔고 있다.
호주에서 나이트클럽 앞을 지키는 기도 일을 할 때다. 가끔 오는 뢧-테일 남자는 항상 희미한 미소를 지어 기억에 남는다. 왼쪽 눈 밑에 다섯 개의 눈물방울 문신이 있었다. 눈 밑 눈물방울은 살해한 사람 수 또는 살해당한 동료 수라고 한다.
*사진은 구글 갈무리
*뢧테일Rat-tail. 쥐꼬리처럼 길러 딴 뒷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