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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불가리아의 아름다운 공주 소피아Sofia

(27) 불가리아의 아름다운 공주 소피아Sofia 

S. Macho CHO

rok-hid @ inbox . 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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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한 나라에 예쁜 공주님이 살았단다.

아주 총명하고 품위 있고 매력적인 아름다운 예쁜 아가씨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왕의 외동딸, 공주님이었다. 어느 날 그 공주가 병에 걸리자 왕은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의사와 치료사들을 불러 치료를 명했으나 공주의 병은 더욱 악화하여 갔다. 아무도 공주의 병명을 몰랐고 치료법도 몰라 애만 태웠다. 죽어가는 공주를 더는 바라만 볼 수 없었던 왕은 공주를 구하기 위해 아주 먼 외국까지 신하를 보냈다. 국경 넘어 수많은 곳에서 의사와 주술사들이 찾아와 사력을 다해 공주를 치료했지만, 가망은 점점 사라져 갔다.

모두 희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을 때, 한 수염 긴 노인이 왕을 찾아와 산을 수십 개 넘어 저 멀리 있는 한 산속 조그만 마을에서 공주가 생활하면 치료가 될 것이라 말하고는 사라졌다. 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하들에게 명령해 다음 날 공주는 왕에게 눈물로 작별인사를 하고 몸종들을 데리고 그 산속마을로 떠났다. 수 십일 후 도착한 조그만 마을은 깊은 산 속에 있는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었다. 마을주민들은 멀리서 온 외국 공주를 친딸처럼 진심으로 보살펴주었다. 공주는 맑은 물과 청량한 공기 속에서 건강을 되찾아 갔다.

몇 년 후 공주는 병이 다 낫지만, 그 마을과 친절한 주민들과 정이 들어 계속 살기로 했다. 그래서, 공주는 마을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아가며 편안하고 평화롭게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수십 년 후, 공주가 죽자 주민들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기리고자 공주의 이름을 붙인 회당을 세웠다. 그 후, 그 마을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다는 소문이 나며 많은 사람이 들어와 정착했고 그 회당이름은 마을 이름이 된다. 소피아Sofia의 유래다.

불가리아사람을 처음 만났던 건 80년대 말 호주에서다. 부모가 불가리아인이라는, 이름도 소피아인 그 여학생의 하늘색 눈동자가 예뻐 지금도 불가리아 하면 요거트보다는 그녀의 눈이 먼저 떠오른다. 지도를 찾아보니 불가리아는 서유럽인데 그녀의 눈동자는 하늘색이고 얼굴에선 이상하게도 동양적 이미지가 보였다. 아주 오래전 병을 고치러 수십 개의 산을 넘어 깊은 산 속 마을까지 찾아왔던 공주는 아마도 동쪽 끝 아시아에서 건너 왔고 그 공주의 후손이 그녀였나 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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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는 불가리아정교회국가다. 그래서 소피아란 세례명을 가진 여성들이 많다. 기원전 44,000년경부터 불가리아에 인류가 살았단다. 기원전 5,000년경엔 문자도 사용했고 자기와 보석도 가공했단다. 러시아, 세르비아 및 동유럽국가들에서 사용하는 키릴Cyrillic문자를 만든 민족이다. 서기 681년 트라키아 유목민과 슬라브족이 모여 불가리아제국이 건설된다. 수도 소피아의 고대 이름 세르디카Serdica는 기원전 7세기 비잔틴 시대 인도유럽계 트라키안족의 한 종족인 세르디Serdi가 정착하면서부터다. 14세기 이후부터 불리워진 소피아는 그리스어로 ‘지혜’를 뜻한다.

서유럽에서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 세르비아 등과 접해 있는 정식명칭 불가리아 공화국Republic of Bulgaria의 수도는 소피아다. 인구 약 120만 명의 소피아는 해발 550m에 위치해 약 250여 곳의 볼거리가 있는 곳이자 유럽에서 아테네와 로마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역사가 깊은 도시다. 몇 걸음만 옮기면 벤치나 있고 숲이 우거진 정원이 나타나는 정원의 도시다. 고고학박물관, 국립역사박물관, 대학교, 도서관, 오페라하우스, 천문대, 미술관, 이반 바조프 국립극장, 반야 바시 모스크, 성 소피아성당, 성 니꼴라이교회, 알렉산드르넵스키 대성당 등 수 많은 예술과 문화의 창고다. 주요 관광지와 유적지로 가는 길을 노란색 보행로로 표시해 어디서나 걸어서 쉽게 빠르게 방문할 수 있다.

수온이 46.8도인 소피아온천은 바냐 바시 모스크 동쪽에 있다. 위장병, 류머티즘에 효과가 커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온천수는 피부에도 좋다고 알려졌다. 또 길거리 공원 등에서 뜨거운 온천수가 나오는 수도를 흔히 볼 수 있다. 무료로 마시고 용기 등에 담아 갈 수도 있다. 수돗물은 깨끗하지만, 부식된 수도관도 있는 편이라 생수를 추천한다. 산악 국가답게 600여 곳의 약수터와 온천이 있어 물 걱정을 안 한다. 그런 물로 만들어서인지 불가리아는 포도주, 맥주가 아주 맛이 좋고 가격도 적당하기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는 불가리아 음식이라고 한다. 문자에 관한 자존심이 세서인지 웬만한 고급식당 차림표는 키릴문자와 영어로 같이 표기해 자존심을 보인다. 우리와 같이 매운 고추, 파, 마늘도 먹어 친밀감이 더 든다.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물가도 저렴한 편이다. 고급 칵테일바 와인도 우리나라보다 싸다. 고급식당에서 맥주와 푸짐한 정식 한 끼에 우리 돈 1만 원이면 충분하다.

흔히 불가리아를 발칸의 붉은 장미라고 표현한다. 장미는 이성의 사랑을 전하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꽃의 대명사다. 장미는 아로마의 여왕이라 한다. 불가리아산 장미는 품질이 우수하다고 알려졌어 장미를 증류법으로 추출해 만든 기름도 기념품으로 인기가 높다. 항바이러스, 건위제, 경련 예방, 살균, 염증 억제, 지혈, 설사 예방, 항우울제 등에 효과 있다. 스트레스와 긴장 완화 등 진정효과가 있어 임신과 출산 전후 우울증에 좋단다. 장미로 만든 음료수도 많다. 그런데 맛은 그냥 장미꽃을 날로 먹는 맛 같다.

불가리아는 공산국가에서 민주화된 나라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첫인상은 현지인들은 무뚝뚝해 보인다. 아마 어려운 경제 환경도 한몫한 거 같다. 그러나 다른 동유럽인들과 다르게 외국인들과 말도 잘 섞는다. 지방에 가면 낯선 외국인도 초대해 음식을 넉넉히 대접하고 잠자리도 챙겨줄 정도로 정교회식 스카프를 쓴 중년부인네들은 우리네 어머니같이 정이 많고 순수하다. 외국인혐오도 없고 러시아도 증오하지 않는다. 그러나 터키인은 좀 다르게 본다.

교회, 수도원, 박물관 등 방문 시 핫팬츠 등 노출이 많은 복장을 피하는 것은 가장 기본상식이다. 현지에서는 현지법을 따라야 한다. 전차나 버스 등은 오전 5~오후 11시까지 운행하며 요금도 1레바/편도로 저렴하다. 택시엔 요금표가 비치돼 있고 꼭 미터기 요금으로 정하고 타야 바가지요금을 피할 수 있자.

여기서도 집시와 난민들이 현지주민과 방문객들의 골칫거리다. 집시 아이들은 차 사이를 다니며 잔돈을 구걸하고 집시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좀도둑질과 소매치기를 한다. 요즘엔 남쪽에서 온 난민들이 사회적으로 제일 문제다. 범죄와 불법체류 등 사회치안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럽 타 도시에 비해선 안전한 편이다. 호객꾼들은 관광객은 귀신처럼 알아내 물건을 훔치거나 환전 때 가짜 돈을 유통하기도 한다. 그래서, 환전은 정식 은행이 가격도 좋고 안전하다.

흑백 적으로 쉽게 판단하는 세속적 방문객들 눈에는 열악한 경제와 재정문제로 낙후된 나라로 쉽게 판단하겠지만 그 어느 민족보다 오랜 역사와 뛰어난 전통문화를 지키며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내면이 깊은 민족이다. 공산국가에서 민주화로 변화되며 여러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긍정적인 가치관의 나라 불가리아는 장수촌이나 요거트 외 보고 즐길 거리가 무궁무진한 파노라마다.

북한 청년 네 명이 주인공인 한 편의 드라마도 있었다. 한반도에서 1953년 휴전이 되자 북한은 2,000여 명의 학생을 공산국가인 소련, 동독, 체코, 루미나아 등으로 유학 보내기 시작한다. 1956년 불가리아 정부의 후원을 받아 특별히 선발된 북한 청년 250여 명이 소피아 대학으로 유학 왔다. 중간에 북한 정부의 호출로 돌아가 가족도 못보고 엄격한 사상교육에 합격한 38명만 불가리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1962년 8월 9일, 돌아온 유학생 중 네 명의 청년은 ‘6.25남침 진실과 김일성 비판’ 성명을 소피아 시 한복판에서 발표한다. 그러자 불가리아주재 북한대사는 그들에게 즉시 북한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급히 도피한 네 명의 유학생은 2주 넘게 소피아 근교 산 등으로 숨어 다니다 북한대사관원들에게 붙잡혀 대사관에 불법 감금된다.

이상종과 이장식 두 학생은 감시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결박한 철삿줄을 끊고 이불보로 끈을 만들어 5층에서 탈출했다. 감금된 지 한 달 만이다. 그러나 최동성과 최동준은 탈출에 실패하고 소피아 공항에서 북한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지기 직전 불가리아 정부에 의해 구출된다. 소피아 대학교수와 불가리아, 중공유학생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한 덕이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월맹대사관의 입회하에 학생들의 의사를 물었고 두 학생은 북한 여권을 찢어 버렸다.

불가리아는 북한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네 청년의 거주를 허가했다. 이 사건 때문에 북한과 불가리아는 대사를 맞추방했고 이후 8년간 국교가 단절되었다. 불가리아는 북한주석인 김일성도 방문했던 나라다. 당시 불가리아는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였지만 소련 쪽인 불가리아와 중국 쪽인 북한은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불가리아는 제 2차대전 때 동맹국 나치가 넘겨달라는 자국 내 거주 유태인을 이런 저런 핑계로 나치에 넘기지 않아 5만 여 생명을 살린 것 같이 북한 청년을 살렸던 것이다.

네 명의 망명객들은 북한 내 가족들이 항일독립군, 소작농 등으로 북한 내에서 출신 성분이 좋고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었기에 특별히 선발되어 외국으로 유학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를 찾아 망명한 후 그들의 북한 내 가족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처형되거나 오지 탄광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망명객들은 불가리아에 거주한 지 5년 후 국적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한국과 수교한 1991년 이후에야 불가리아와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연구원, 여행사, 지사장, 공장장 등 현지인과 결혼해 자식농사도 잘 지었고 풍요롭게 인생을 살았다. 은퇴 후엔 불가리아 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봉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2013년 12월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려냈던 네 명의 망명객 중 한 명인 이장식 씨가 세상을 떴다.

환율 레바Lv, 1.00 Lv (= 100 Stotinki) = 약 700원. 1.95Lv = 1 Euro
항공 유럽 주요 도시 경유(이스탄불, 론돈, 프랑크 푸르트 등)
국제전화 +359
인구 710만 명 (불가리아인 85%, 터키인 9% 등)
인터넷 .bg
시차 7시간 (예: 서울 오후 3시 = 불가리아 오전 8시)
운전 오른쪽(왼쪽 핸들)
공식 언어 불가리아어
통용 언어 불가리아어, 터키어
공식종교 불가리아정교Bulgarian Orthodox
정부 수반 대통령

정보 http://www.tourism.government.b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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