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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UPI, 한국 산업화 그늘 재조명

미 UPI, 한국 산업화 그늘 재조명
– 1980년대 노동운동가, 20년 가까이 외면 받아
– 이명박-박근혜 집권 이후 노동자 권리 오히려 퇴보, UPI 보도 주목해야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런 경제발전이 박정희 덕분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진짜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들은 노동자들이다.

개발 독재시절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독재가 종식된 1980년대 노동자들은 권리 찾기에 나섰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정권은 노동운동을 불온하게 여겼고, 노동운동 주모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미국 UPI는 과거 탄압받았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했다. UPI의 보도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민주주의로 이행이 되었어도 탄압받았던 노동자들에 대한 복권은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출범까지 전혀 공론화되지 않았음을 UPI 보도가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엄혹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박근혜 집권하면서는 아예 개발독재가 교의로까지 격상되고 있는 상황이다. UPI보도는 그동안 한국에서 이행됐던 민주화와 산업화의 그늘을 조명해 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뉴스프로는 UPI보도 전문을 번역해 소개한다.

번역 감수:  이진화

기사 바로가기 ☞ http://bit.ly/1LOnim4

Labor activist from South Korea’s dark past finally finds justice

한국의 어두운 과거 시절 노동 운동가 마침내 정의를 찾다

By Elizabeth Shim | Updated July 27, 2015 at 10:4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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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n assembly line workers formed labor unions to protest unfair working conditions. Here, in this 1980 photo, women workers at a wig factory celebrate a union member’s birthday. Photo courtesy of Bae Ok-byoung
한국의 조립 라인 노동자들은 불공정한 근로 조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980년도에 찍은 이 사진에서 가발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조합원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SEOUL, July 27 (UPI) — On May 18, 1980, Bae Ok-byoung, a South Korean assembly line worker in southern Seoul, was taken into police custody and tortured for leading a labor strike that would alter the course of her life.

서울, 7월 27일(UPI)– 1980년 5월 18일, 서울 남부지역에 위치한 한국의 한 조립 라인의 노동자 배옥병 씨는 경찰서에 잡혀가 노동자 파업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으며, 이일은 그녀 인생 전반을 바꾸어 놓게 됐다.

“The skin on my chest peeled away from being forced to crawl naked on the jail floor,” Bae said in a recent interview with UPI, her eyes filling with tears.

“알몸으로 감옥 바닥을 강제로 기어가게 해서 가슴 살갗이 다 벗겨졌어요,” 라고 배 씨가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UPI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다.

The punishment was part of what South Korea’s authoritarian regime referred to as “purification education” for activists like Bae, then a 23-year-old worker at Seotong, one of South Korea’s largest producers of wigs for export.

이 같은 처벌은 당시 ‘서통’이라는 한 한국 최대의 가발 수출 업체에 다니던 23살의 노동자인 배 씨와 같은 활동가들에게 한국 독재정권이 실시한, 이른바 “순화 교육”이라는 교육의 한 부분이었다.

South Korea’s peaceful transition to a civic democracy more than two decades ago should have removed the past charges. But Bae said state-sponsored injustices against her remained uninvestigated until 2005, when a group of former union leaders requested a newly established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o examine the historical crackdown on their activities.

20여 년 전 평화롭게 시민 민주주의로 정권을 이양한 한국 정부는 이 같은 과거의 혐의들을 벗겨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배 씨는 지난 2005년, 전 노조 지도자 단체가 새롭게 출범한 진실 화해 위원회에 자신들의 과거 활동에 대한 역사적인 탄압을 조사하라고 요구하고 나서야 국가 차원에서 그녀에게 저지른 부당 행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Bae has filed court cases in the past, but it was this year — on July 5 — that she was finally acquitted of the false charges after a retrial at a Seoul High Court.

배 씨는 오래전에 법정 소송을 제기했으나 그녀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고한 혐의에 대해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은 것은 올해 7월 5일이었다.

The victory is personal for Bae, who still carries the traumatic memory of jail torture from age 23. Bae’s brush with the dark side of a past autocratic regime is part of South Korea’s incredible growth story. But tales like hers have been tucked away from public memory. Now, she has contributed artifacts from her past working life to an ongoing exhibit at the Seoul Museum of History highlighting the lives of unsung factory employees.

23살부터 지금까지 감옥에서 당한 고문에 대한 충격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배 씨에게, 승리는 개인적인 것이다. 지난 독재 정권의 어두운 측면과 배 씨가 일으킨 충돌은 한국의 놀라운 성장기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와 같은 일화들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 같은 이유로 배 씨는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름없는 공장 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한 전시회에 그녀가 과거 일하던 시절의 유물들을 기증했다.

From a country with a GDP per capita in the 1960s comparable to the poorer countries of Africa and Asia, South Korea has grown into a trillion-dollar economy that boasts cutting-edge technology and a high standard of living.

1960년대에 1인당 GDP가 더 빈곤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과 비슷했던 한국은 높은 생활 수준과 최첨단 기술을 뽐내는 1조 달러에 달하는 경제로 성장했다.

Inside Seoul’s clean and efficient subways, young South Koreans in skinny jeans tap away on their glassy Samsung smartphones. Some head to work while others plan to meet with friends – and no one lives in fear of government reprisals.

깨끗하고 효율적인 서울 지하철 안에서는, 스키니 진을 입은 젊은 한국인들이 유리처럼 빛나는 삼성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으로 향하고, 다른 이들은 친구들과 만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But the spectacular rise of South Korea’s industry and the emergence of a civic society was sustained by workers like Bae, who began factory life at age 18 and toiled for a pittance at a factory in the Guro Industrial Complex, a manufacturing base in southern Seoul. In its heyday, Guro’s factories employed more than 120,000 workers to churn out apparel and consumer electronics. Bae devoted 14 to 16 hours a day in her late teens and early 20s to the painstaking work of wig manufacturing.

그러나 한국 산업의 눈부신 성장과 시민 사회의 출현은 18살부터 공장 생활을 시작하여 쥐꼬리만 한 돈을 위해 서울 남쪽에 있는 제조업의 본거지인 구로 산업 공단 공장에서 억척같이 일한, 배 씨와 같은 노동자들에 의해 지탱됐다. 전성기에, 구로에 있는 공장들은 소비가전 제품과 의류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12만 명 이상을 고용하기도 했다. 배 씨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힘든 가발 제조 노동에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을 바쳤다.

Factory girl

여공

A typical workday began at 3 a.m. Like other workers, Bae was incentivized to work long hours because compensation was based on the number of wigs completed.

보통의 근무 일은 새벽 3시에 시작됐다. 보상금은 완성된 가발의 수에 따라 책정됐기 때문에 배 씨 역시 다른 근로자들처럼 장시간 일하도록 고무됐다.

But even as the future dissident worked painstakingly on wigs that mimicked the blonde locks of ’70s-style icons Farrah Fawcett or Cheryl Tiegs, the best she could earn was a monthly wage of $36.

미래의 반체제 인사는 70년대 스타일의 아이콘인 파라 퍼셋 또는 셰릴 티그스의 금발 머리카락을 흉내 낸 가발을 공들여 만들었으나, 그녀가 가장 많이 벌 수 있었던 것은 월급 36불이었다.

The artificially low wages enabled the factory proprietors to expand. In the 1970s, wigs were a top export item – the third-largest source of revenue for South Korea, after clothes and plywood.

공장주들은 의도적으로 책정된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가발은 최고의 수출 품목이었고 한국에서 의류와 합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재원이었다.

According to Pusan National University’s Korean Studies Institute, one-third of wigs worn by North Americans in the 1960s and ’70s were manufactured in Korea. Exported wigs were earning over $93 million in annual revenue by 1970.

부산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 따르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북미에서 착용된 가발의 3분의 1이 한국에서 제조된 것이었다고 한다. 가발 수출로 한국은 1970년까지 연간 매출 9천3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Bae told UPI that 90 percent of the wigs made at Seotong were bound for the United States.

배 씨는 서통에서 만들어진 가발의 90퍼센트가 미국으로 가는 것이었다고 UPI에 말했다.

In the factories, a poor safety net meant industrial accidents were common, as was the disciplining of workers who failed to follow orders.

공장의 부실한 안전망은 산업재해가 흔하게 일어났음을 뜻했고, 지시를 따르지 않은 노동자에 대한 징계 또한 흔한 일이었다.

Kim Won, a historian at South Korea’s Academy of Korean Studies who has written about factory conditions in the Guro Industrial Complex, has said verbal disciplining of workers for the slightest mistakes occurred every day on the assembly line, as did assaults on their personal dignity. Workers even lost their names and were reduced to epithets like “hemline” or “stapler,” based on job function. In other instances, they were simply reduced to an identification number.

구로 공단에 있는 공장의 실태에 대해 쓴 김 원 한국학 연구소 역사학자는 작은 실수를 저지른 노동자를 구두로 질책하는 일이 조립 라인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이는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존엄성에 대한 폭행이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이름으로조차 불리지 못하고 직무에 따라서 “햄라인” 혹은 “스템플러” 같은 별명으로 불려졌다. 다른 사례에서도 그들은 그저 사원 번호 정도로 취급됐다.

Fight for labor rights

노동권 투쟁

Bae and her fellow workers were not even aware of labor protection laws until she attended night school, where teen workers could supplement their busy factory lives with a high school education.

배 씨와 동료 노동자들은 야간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노동보호법을 알게 되었고, 이 야간학교에서 10대 노동자들은 바쁜 공장 생활에 고등학교 교육을 추가할 수 있었다.

It was here Bae met with university students in 1978, some who taught the classes but also educated the workers – daughters from impoverished rural families – on their rights.

1978년 배 씨는 야학에서 대학생들과 만났다. 그들은 수업도 해주었지만 가난한 시골가정 출신의 딸들인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권리 또한 일깨워 주었다.

“I didn’t develop a labor consciousness until I met with student activists,” she said.

“학생 운동가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노동의식이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Through their vigorous campaigning and educational outreach to workers like her, Bae realized she was substantially underpaid, and that she had a right to protest unfair working conditions.

그녀와 같은 노동자들을 위한 학생들의 활발한 활동과 교육 봉사를 통해, 배 씨는 그녀가 실질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고 있고 불공정한 근로환경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By early 1980, when Bae was organizing a labor union at her factory, her monthly wage of $73 was barely sufficient to keep up with the living costs outside the factory dormitory and cafeteria.

1980년 초, 배 씨가 자신이 근무하던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할 당시, 그녀의 한 달 임금 73달러는 공장 기숙사와 식당 밖에서의 생활비를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But as dissatisfaction fomented among employees, Bae and her colleagues were confronted with another obstacle, when her company created a pro-corporate labor union.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조성됐지만, 회사 측이 친기업노조를 만들자 배 씨와 그의 동료들은 또 다른 장애물과 대립하게 되었다.

Angered by the company’s calculated move, workers staged a three-day strike demanding better wages. The standoff with management resulted in Bae’s arrest on trumped-up charges of violating a South Korean security law and inciting violence against the chief executive of Seotong.

회사의 계산된 움직임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3일간의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회사 측과의 교착상태는 배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과 서통 사장에 대한 폭력을 선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구속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Bae served an 18-month prison sentence that involved one month of dehumanizing torture, but the punishment did not stop after her release.

배 씨는 한 달간의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고 18개월간 투옥되었다. 그러나 석방 이후에도 그 벌은 멈추지 않았다.

South Korea, then under the dictatorship of President Chun Doo-hwan, had blacklisted dissidents like Bae for unauthorized union activities. Not only was she banned from being hired nationwide, but her younger sister at a neighboring factory, marked with guilt-by-association, also was dismissed.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 치하에 있던 한국은 불법 노조활동을 하는 배 씨와 같은 반체제 인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녀는 국내에서 직장을 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옆 공장에 다니던 그녀의 여동생 역시 연좌제로 해고되고 말았다.

South Korea transitioned to electoral democracy in the 1990s, but Bae has had to wait until 2005 for investigations to begin on her case. Then, ten years later, a Seoul court dismissed the false charges that led to her imprisonment.

한국은 1990년 대에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로 전환 했지만, 배 씨는 2005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0년 후, 서울 법원은 배 씨가 감옥생활을 하도록 만든 거짓 혐의들을 기각했다.

The court case the former dissident won on July 5 is a personal victory, but her past activism in a difficult time period informs the present decisions of the mother of two in ways that reach closer to home and South Korean families.

7월 5일, 이전의 반체제인사가 재판에서 이긴 것은 개인적인 승리이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그녀가 했던 노동운동은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가 현재 한국의 다른 가족들에게 더욱 마음으로 가깝게 다가가는 결정을 내리도록 해준다.

“I now campaign for better food quality in school cafeterias,” Bae said, smiling proudly.

배 씨는 “지금 나는 학교 식당에서 보다 나은 급식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 저작권자: 뉴스프로, 번역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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