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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투에 갓을 쓴 무슬림

상투에 갓을 쓴 무슬림

S. Macho CHO

seoulcentralmosque

السلام عليكم 앗살라무 알라이쿰. 가장 대중적인 이슬람 인사말로 ‘신의 가호를 빈다’란 뜻이다. 기독교의 사촌쯤인 이슬람Islam교 신자를 무슬림Muslim이라 부른다. 한반도와 무슬림의 최초 인연은 기록상 851년 발간된 페르시아 상인 술라이만의 ‘중국과 인도 소식’이라는 여행기에 “중국 바다 건너에 신라가 있다”고 처음으로 언급되면서부터다. 그 뒤 많은 아랍의 문헌에 신라에 대한 기록들이 등장한다. 고려, 백제, 신라로 나뉜 삼국시대 시기, 신라를 찾은 대식국, 아라비아에서 온 아랍계 무슬림들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그리고 자원이 풍부한 무역중심지 경주와 인근 항구에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당시야 여권, 비자 등이 없었으니 지금처럼 정착하는데 그리 까다롭지 않았으리라. 8~9세기 왕릉 주위엔 아랍인모습의 무인석상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처용설화’의 주인공 처용도 아랍계 무슬림이라 추측된다. 한편, 중국 동쪽 항구 양주에는 신라인들이 모여 사는 신라방과 아랍인거주지 번방이 있어 서로 교역이 활발했다고 전해진다. , 종족간의 전쟁을 피해 아랍인 귀족들이 신라에 망명해 왔다는 기록도 있다.

11세기 초 고려시대는 아랍인들이 가장 많이 들어 온 때였다. 종종 아랍상인들은 100명 이상의 많은 사절단과 같이 와 고려 조정과 교역을 했다. 주로 향료나 몰약, 약제, 사치품 등을 가져와서 고려의 금, , 옷감 등으로 바꿔갔다. 고려 왕은 이들이 묵을 수 있는 객관까지 지어 대접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도 개성에 아랍상인들인 서역인 집단이 이슬람 성원인 마스짓Masjid, 예궁을 짓고 살았다고 써있다. 1274년 고려 25대 충렬왕에게 시집오던 몽골공주의 호위무사 위구르Uighur계 감가는 후에 장군까지 올랐다. 왕으로부터 ‘장순룡’이란 이름까지 하사 받고, 지금의 개성 시 근교 덕수현에서 고려 여인과 결혼해 살다 세 아들을 남기고 44세로 죽었다. 그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모시고 덕수를 본관으로 해 ‘덕수德水 장씨대를 이어왔다. 특히 12대손 장유는 조선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우의정까지 올라, ‘계곡집’같은 명문 필집을 남겼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덕수 장씨 후예들은 3만 여명으로 해마다 10월이면 가문의 영광과 복을 비는 ‘장말도당굿’을 벌인다.

한반도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13~14세기였다. 고려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당시 사회에 새로운 이슬람 문화와 풍습을 소개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 후 많은 위구르와 투르크Turk 무슬림들이 역관, 서기, 무관 등 직책으로 고려왕조에 충성하며 고려여인들과 결혼해 살았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대중적인 술인 ‘소주燒酒’의 역사 역시 고려시대에서 찾는다. 기원전 3,000년 아랍 메소포타미아 수메르가 기원이다. 세 번 고아 내린 증류수란 뜻인 소주는 중동의 이랔Iraq을 통해 ‘아라끄’라 불렸다. 몽골군이 1258년 압바스왕조 Abbasid caliphate를 침략했을 때 처음 양조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 이후 몽골이 일본원정을 위해 제주도, 안동, 개성 등에 주둔하며 가죽물통에 넣고 마시는 ‘아라끄’를 제조했다. 그 후 고려인들도 따라 빚어 마시기 시작해 고려 소주의 본산인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 불렀다.

많은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끼친 이슬람적 영향도 적지 않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흔적은 이슬람력, 즉 ‘히즈라Hijriyah를 도입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히즈라’는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 처음으로 무슬림들이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한 것을 뜻하며 서기 6227월이 이슬람력이 시작되는 1년이다. 달의 주기에 따라 개월이 바뀌는 ‘히즈라력’은 한 달이 29, 1년이 12개월, 354일이다. 초승달이 보이면 한 달이 시작되고, 날의 시작은 해가 질 때다. 지금 사용하는 ‘음력陰曆’도 이슬람 문화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초까지 사용되던 해와 달의 관측방법인 ‘중국 수시력’은 이슬람 역법을 중국에 맞게 변형한 것으로 우리나라 계절과 안 맞았다. 이에 정인지 등이 중국에 유학해 태양과 달의 위치계산에 의한 일월식 원리를 연구하고, 우리나라의 환경에 맞도록 정리한 것이 한문으로 된 이슬람천문역법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며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이다.

유교가 주류인 조선시대에도 궁중의 공식행사에 무슬림 지도자들이 초청되었고, 이슬람 의식에 따라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세종실록’에 나온다. 대부분 아랍인들은 조선땅에서 살아가며 사회에 흡수되었고, 현재에 남아있는 몇몇 성씨의 가문은 이들을 시조로 한 것으로 추측한다. 무슬림들은 한국인들과 결혼을 거듭하며 또한, 이맘Imam 등 종교지도자가 없이 전국으로 흩어져 한국인에 동화되어 점점 고유 종교와 풍습 등이 희석되어, 문헌 등에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20세기 초엔 러시아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한반도로 건너와 정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이슬람은 한국전쟁 때 무슬림들인 터키군의 연합군 참전으로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1953년 종전 후 터키군과 군 이맘의 지원과 선교 등으로 서울 이문동에 임시 마스짓이 세워진다. 이것이 한국 이슬람 근대사에서 최초 모스크Moaque가 된다. 그 후 말레이시아 이슬람대학 장학생으로 유학 가는 한국 무슬림이 생긴다. 터키 군이 철수한 후 한국인 무슬림들에 의한 독자적인 공식 조직체 겸 임시 모스크인 ‘한국 이슬람 재단’이 발족돼, 오늘날 ‘한국 이슬람 중앙회Korea Muslim Federation’의 시초가 된다. 그러나 밋밋하던 한국 이슬람이 획기적 전환을 맞이한 계기는 1975년 ‘석유 파동’ 때 중동이슬람권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였다. 한국을 자주 방문하던 아랍 관료들은 한국 내 이슬람 발전에 큰 관심을 갖는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슬람 권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과감하게 친 아랍 정책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친 아랍 정책의 일환으로 국내 이슬람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도 따랐다. 특히 이슬람 교단을 중동 진출을 위한 민간 외교 창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정부요직에 있는 많은 인사들이 이슬람교단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교단 발전에 힘을 보탠다.

19765월엔 한남동 언덕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재정 지원으로 지금의 중앙 모스크가 개원한다. 중앙 모스크의 건립은 당시 중동 붐으로 한국인의 관심을 받았고, 중동에 진출하는 기업과 일반인들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개원 전 3,000 명 정도에 불과하던 이슬람신자 수가 개원 후 3년 후에 15,000명으로 급증한다. 그러나 당시 개종한 신자들의 다수는 충분한 이슬람 지식이나 신앙에 바탕을 두었다기 보다는 취업, 유학, 사업, 결혼과 같은 현실적 필요성과 맞물려 순수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이나 취업을 위해 중동국가들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 중 일부는 실제로 이슬람 종교에 심취해 귀국 후 진실한 무슬림이 되었다.

외적 성장에서 한국 이슬람교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80년대 초였다. 이 시기 두 번째 모스크가 리비아정부의 지원으로 부산에, 세 번째 모스크가 쿠웨이트정부의 지원으로 경기도 광주에 건립되었고, 경기도에 이슬람대학 건립도 계획했었다. 또한 해외에서의 한국인 선교와 교육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슬람 교육원과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지회, 그리고 쿠웨이트와 인도네시아에도 지회가 설치되었다. 중동 각국에 파견된 수십만 명의 한국인 근로자들을 상대로 활동한 중앙회 해외 지회는 5~6년간 7,000 여 명 이상을 무슬림으로 귀의시켰으나, 허술한 신도관리와 귀국 후 신앙을 계속하기 어려운 여건 등으로 많은 신도들이 모스크를 떠나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중동 붐이 사라졌고, 이란이라크 전쟁, 한국 이슬람의 1세대 지도자들의 연이은 타계와 조직 내부의 교권분쟁 같은 내외적 요인들에 의해 정체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종교를 삶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계층이 빠져나가며 서서히 질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5개의 마스짓과 임시 예배장소 등을 중심으로 총인구의 약 0.2%100,000여 명의 한국인 무슬림이 이슬람경전 ‘꾸란Quran’을 읽고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외국인 무슬림 노동자의 급격한 유입으로 안양, 안산, 의정부 등 전국에 30여 개 간이 예배장소까지 생겨났다. 무슬림들의 예배장소인 모스크를 방문할 때, 짧은 치마 등 노출이 심한 복장, 반려동물동반 등과 예배 시 무단 촬영, 흡연, 음주, 고성방가행위는 비상식적인 짓이다. 타인의 종교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다. 사찰이나 모스크 등에서 개신교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독경전을 묻는 땅밝기 등 개념 없는 무례한 행동은 삼가자.

*이랔Iraq, 마스짓Masjid등은 현지발음에 따라 표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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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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