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란탄에 울린 ‘반자이’
S. Macho CHO
2차 세계 대전은 1939년과 1940년에 독일이 폴란드와 프랑스를 연달아 침략하며 시작되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유럽으로 날아가 독일, 이딸리아와 베를린에서 동맹을 맺는다. 1868년 일어난 메이지 유신으로 중앙집권을 이룬 일본은 특히 산업과 군사력 등을 중점으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산업화를 필요한 원자재가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원자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바로 아시아다.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Asia For Asia)’와 ‘동아시아의 번영(Prosperity With The Great East Asia)’ 등을 궁색한 핑계로 삼았다. 1931년 만주를 시작으로, 1937년엔 중국, 1940년 인도차이나를 차례로 침략해 점령해 나간다. 가장 빠르게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아직 내란과 서구 열강의 간섭 등으로 쇠약했던 주변국들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들은 주석, 석유, 고무 등의 수출을 금지하는 대일본 경제제제로 맞서 일본의 먹구름 행보에 제동을 건다.
말레이시아 반도 북동쪽에 클란탄(Kelantan) 주(州)가 있다. 북으로 태국과 국경을 맞닿은 지역이다. 클란탄은 오랫동안 태국 시암국 영향을 받다가1909년 체결된 조약에 의해 영국의 보호를 받게 된다. 잔잔한 파도소리만 이는 클란탄의 주도 코타 바루(Kota Bahru)항 앞바다에 검은 불길한 그림자들이 다가온다. 해안가를 감시하던 영국군의 눈에 낯선 군함들이 보였다. 영국군은 즉시 일본군함을 향해 대포를 쏴댔다. 일본군함의 함포반격에 항구와 주변은 불바다를 이룬다. 이것이 최초의 영국군과 일본군간의 전투이자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 된다. 1941년 12월 8일 00시 25분이다.
당시 영국군과 네팔 구르카 부대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영국군의 방어선은 곧 무너졌고 용병한 구르카 부대원들은 구크리 단검을 들고 저항했으나 일본군은 해안에 상륙해 영국군 시설들을 하나하나 장악하기 시작한다. 내륙에 주둔해 있던 영국과 호주공군의 전투기들은 즉시 밤공기를 가르며 공습했으나 7대나 함포에 맞아 추락하며 일본군함들 63척 중 겨우 한 척만 침몰시킬 수 있었다. 몇 시간 후 남은 영국전투기들은 후방으로 날아갔고 군인들과 물자 등은 차량과 기차를 이용 급히 후퇴했다. 아침이 밝자 전세는 더 기울어 영국군이 떠난 여러 기지들은 일본군 수중으로 떨어져 점령군 본부엔 일장기가 걸렸다.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클란탄 주는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된다. 말레이시아 정부공무원들과 주민들은 재빨리 피난을 떠났고, 영국관리들이 거주하던 건물들도 연달아 일본행정부가 접수했다. 영국계 은행건물은 일본비밀경찰서로 변신했다. 영국과 호주공군기지는 일장기가 그려진 전투기들이 뜨고 내렸고, 세관과 철도사무소도 일본해군기지로 변모했다. 여기저기서 ‘반자이(만세)’함성들이 들린다. 단 2~3일만에 벌어진 일이다.
일본 점령하의 클란탄엔 여러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모든 정부부처는 일본 행정부가 접수했으며 교통시설부터 식량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군이 통제했다. 모든 클란탄 원주민들을 강제로 일본식 행정과 전통을 따라야 했다. 심지어 모든 공문서는 일본어로 사용했고,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일본어를 공식언어로 선포했으며 학교에서는 기미가요를 배우고 부르게 했다. 새로운 화폐도 일본행정부가 발행한다.
후방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은 당시 불법으로 규정했던 중국계 말레이 공산당을 공식으로 인정하며 공동작전을 추진한다. 그리고 12월 15일엔 모든 좌익정치범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킨다. 싱가포르에 세운101 특수 훈련소에서 165명의 말레이 공산당원들이 게릴라 훈련을 받고 말레이반도로 돌아와 열악한 무기만으로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가 일본에 함락되기 직전, 공산당원들은 4개 부대로 편성해 말레이시아남부 조호르(Johor)에서 작전을 시작한다. 곧 부대들은 말레이 인민 항일부대(Malayan People’s Anti-Jap Army)로 통합되어 습격과 매복 등으로 일본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자, 남아있던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보복 대상이 된다. 일제의 억압 속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많은 중국계 말레이인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게 된다. 말레이 인민 항일부대는 그들을 자신들의 은거지인 정글에서 살게 돕고 공동협력관계로 발전시킨다.
1943년 8월 22일 점령국 일본과 당시 독자적인 태국정부는 클란탄, 트렝가누, 크다와 펄리스 주 등을 태국에 양도하는 문서에 합의한다. 곧 10월 18일 클란탄주재 태국군정 본부가 크다(Kedah) 주 주도 알로 스타에 설치되며 2년 임기의 고등판무관이 주둔한다. 태국군정이 클란탄을 통치할 당시 지역 행정은 술탄과 태국군이 공유했으나, 모든 결정권은 클란탄 술탄에게 있었다.
1944년, 드디어 말레이 인민 항일부대는 동남아시아연합사령부(Allied Southeast Asia Command)와 공동작전에 서명했지만, 실제로 무기와 장비를 공중으로 보급받을 수 있던 건 그 이듬해 봄부터였다. 말레이 인민 항일부대는 북부 파항(Pahang)주에서도 원주민 욥 마히딘(Yeop Mahidin)이 만든 부대와 같이 작전했다. 마히딘은 파항 술탄의 지원으로 254명으로 구성된 게릴라부대를 조직, 바투 마림 훈련소에서 영국군 리쳐드슨 소령이 지휘하는 136 특공대로부터 훈련 받는다. 마히딘이 수 십 차례에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성과 탁월한 작전능력들로 인해 참패 당한 일본군은 그를 ‘Singa Melayu(말레이 사자)’로 부르며 두려워했다.
어디에서나 매국노들은 있다. 일본은 클란탄을 공격하기 전 정부에 불만 있던 원주민들을 선동해 비밀조직 ‘거북이 회’를 만든다. 그러나, 곧 말레이시아 경찰에 인지되어 일본의 공격 직전 조직의 두목들이 체포된다. 공격 이틀 전 일본 특수부대원들이 코타 바루해변까지 헤엄쳐 와 숨어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다. 코타 바루에 있던 비밀조직원들은 해변을 통해 상륙한 일본군을 도와 안내원역할을 했다. 일본이 점령한 후, 그들은 지역에서 각종 이권이나 재산을 차지하며 일제의 앞잡이로 부와 권력을 축적한다.
라이 텍(Lai Teck)이라는 40대 초반 벳남-말레이계 공산당 간부가 있었다. 싱가포르가 일본에 함락당하면서 미쳐 탈출 못해 체포된 말레이 공산당원들은 곧 모두 처형당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몇 일 후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1942년 9월 1일 밤, 100명이 넘는 말레이 공산당과 항일부대 지도자들이 수도 쿠알라 룸푸르 북쪽 바투 동굴(Batu Caves)에 모여 비밀회의를 하다, 정보를 미리 알고 급습한 일본군의 총칼에 대부분 죽었다. 이 사건으로 말레이시아 내 항일운동 지도자 대부분이 사라졌다. 라이 텍, 그도 이 회의에 참석해야 했으나 자동차고장으로 가지 못해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 후 그는 말레이 항일조직의 지도자로 뽑혔으나, 항일부대는 4,500여명의 군사력도 제대로 활용도 못하고 우왕좌왕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 중 그가 보인 여러 미심쩍은 행동들을 밝히라는 당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젊은 청년당원들은 대부분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초, 그는 중앙당 위원회에 참석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회의에 참석할 시간에 중앙당의 자금을 훔쳐 싱가포르를 통해 홍콩으로 도망간다. 몇 일 후 태국에서 모습을 보인다. 몇 일 후, 라이 텍은 말레이 인민 항일부대의 요청으로 그를 추적하던 벳남 독립당원들에 의해 방콕에서 살해당한다. 후에 공개된 일본군 비밀문서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첩자로 천왕에 충성을 맹세했고, 많은 말레이 공산당과 항일부대 극비자료 등을 일본군에게 제공했단다.
코타 바루 상륙작전은 일본도 피해가 컸다. 상륙하며 일본군은 300여명이 죽고 500여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일본군의 총과 칼에 쓰러진 말레이시아 국민은 약 10만 명이 넘는다. 코타 바루를 공격한지 약 한 시간 반 후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을 무차별 공습한다. 이 진주만 공격을 영화화한 ‘토라 토라 토라(Tora tora tora)’에서 공격을 지휘한 야마모토 일본 해군제독의 독백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은 상대하는 힘든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
그로부터 약 3년 8 개월 후 일본은 본토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자 얼마 전까지 ‘반자이’를 외치던 두 팔을 들고 무조건 항복한다.
** 이딸리아(Italia), 벳남(Viet Nam) 및 말레이시아 일부 지명 등은 현지 발음에 따라 표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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